소비자 · 산업 영역의 몰입 경험 사례

[테크월드=이건한 기자] ‘몰입(沒入)’, 무언가에 흠뻑 빠져 심취해 있는 무아지경의 상태. 심리학 용어사전에서는 몰입에 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바쁜 일상과 업무, 눈만 돌리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자극적인 콘텐츠가 범람하는 요즘 세상에선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몰입의 가치는 꽤 달콤하게 느껴진다.

몰입에 필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일차적으론 흥미, 이차적으론 감각의 자극을 들 수 있겠다. 현재 여러 멀티미디어 중 가장 집중하기 쉬운 포맷은 동영상이다. 전통의 문자와 그림 콘텐츠 역시 충분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정보로 몰입을 유도할 수 있지만, 시청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영상에 비해선 아무래도 주목도가 낮은 편이다.

현재 유튜브와 넷플릭스, 틱톡 등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엔터테인먼트 서비스들의 대부분이 영상 콘텐츠를 유통하는 플랫폼이다. 만일 게임도 영상 콘텐츠의 범주로 넣는다면 영상 콘텐츠의 영향력은 아마 더욱 커질 것이다.

전 세계 흥행몰이 중인 숏비디오 플랫폼 틱톡 (자료=틱톡 공식 홈페이지)

하지만 동영상도 한계는 있다. 평평한 디스플레이 속 영상을 눈으로만 보는 건 아무래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비슷한 패턴의 영상 콘텐츠가 범람하면서 영상 자체에 대한 주목도도 예전 같지 않다. 이에 영상을 지나 차세대 몰입경험 기술로 주목받는 것이 바로 증강현실(AR)과 가상현실(VR), 이를 합친 혼합현실(MR), 그리고 3D 오디오 등이다.

이들 기술은 단순히 보는 경험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 없는 정보나 화면 속 영상으로만 보던 세상을 사용자에게 보다 생동감 있게 제공한다. 나아가 콘텐츠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환경까지 제시하며 몰입을 극대화한다. 시장 전망도 밝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가트너(Gartner)는 지난해 10월 발표한 2019년 10대 전략기술 트렌드 중 6번째로 ‘몰입 경험(Immersive experience)’을 선정한 바 있다.

또한 최근 몰입 경험의 범위는 소비자 소비자·엔터테인먼트 콘텐츠에 국한되지 않고, 제조산업 현장으로도 그 영향력을 넓혀가는 추세다. 비록 아직 일반 소비자 시장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성장세만큼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가 발간한 ‘산업용 AR의 기술동향과 산업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산업용 AR 분야별 매출 합계는 2018년 6000만 달러에서 2022년 28억 달러로 성장하며 연평균 162.7%에 이르는 폭발적인 성장을 예고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AR과 VR을 비롯한 각종 몰입 경험 기술은 앞으로 일상과 산업 현장 전반에 빠르게 퍼져 나갈 전망이다. 이번 글에서는 다가올 몰입 경험 전성시대에 앞서 AR, VR, MR, 그리고 3D 오디오 기술이 소비자/산업 분야에서 각각 어떤 모습으로 구현되고 있는지 다양한 사례를 살펴볼 것이다.

 

VR – 엔터테인먼트에 최적화된 상상의 세계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은 실존하지 않는 세상을 3차원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한 공간이다. 만화나 영화처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특히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제작에서 강점을 보인다. 다만 완전한 VR 몰입을 위해선 시청각을 현실에서 분리해야 하는데, 이때 일반적으로 오큘러스나 삼성전자, HTC 같은 회사의 HMD(Head Mounted Display)가 주로 사용된다.

VR용 HMD는 스마트폰을 본체로 사용하는 모듈형, HMD 자체 디스플레이가 내장된 독립형, 고사양 콘텐츠를 즐기기 위해 PC와 연결하는 연동형 등이 있다. 모듈형은 초창기 구글이 선보인 ‘카드보드’나 삼성전자의 ‘기어VR’ 등이 대표적이다. 구조가 단순하고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연결하는 스마트폰의 성능과 해상도에 따라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의 질이 상이하다는 단점이 있다.

PC와 직접 연결할 수 있는 HMD 중에서는 HTC의 ‘바이브(Vive)’가 유명하다. 수십 개의 센서를 탑재하고 넓은 시야각을 지원하며 전용 컨트롤러 지원, 여기의 PC의 고성능 하드웨어를 연동할 수 있기 때문에 고사양 게임을 비롯해 즐길 수 있는 콘텐츠의 범위가 넓다. 문제는 그만큼 비싼 가격. 현재 국내에 출시된 바이브의 기본 모델 가격은 80만 원대, 전문가용은 160만 원, 엔터프라이즈 모델은 184만 원에 이른다. 연결에 쓸 PC와 기타 액세서리 가격까지 더하면 비용은 눈덩이처럼 증가한다.

HTC 바이브

HP도 얼마 전 한쪽 눈 당 2160x2160 해상도, 양쪽 도합 4K의 고해상도 콘텐츠 플레이가 가능한 HMD인 HP ‘리버브(Reverb)’를 공개하며 주목을 받았다. FHD 이하 낮은 해상도로 인한 화질 저하가 HMD VR 콘텐츠의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주요인 중 하나였던 만큼, 높아진 해상도로 인한 몰입 도의 극대화를 기대해볼 수 있다. 공식 출시일은 미정이지만 가격은 바이브와 비슷하거나 약간 낮을 것으로 예측된다.

HP 리버브

최근엔 독립형 VR HMD의 인기도 높다. PC와 공간의 제약을 완전히 벗어나 가장 온전한 형태의 가상현실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독립형 VR 기기를 만드는 회사 중에서는 오큘러스가 유명하다. 오큘러스는 오큘러스 리프트로 VR HMD 시장을 연 상징적인 기업임과 동시에 페이스북의 인수 후 지속해서 공격적인 개발 투자를 이어가고 있는 기업이다.

작년엔 한국에도 공식 출시한 20만 원 대 보급형 VR 기기 오큘러스 고(Go)를 공개한 바 있고, 올해는 센서 종류와 성능을 대폭 개선하면서도 가격을 399달러로 저렴하게 책정한 오큘러스 ‘퀘스트(Quest)’를 공개했다.

오큘러스 퀘스트

HMD를 활용한 VR은 작은 기기를 머리에 쓰는 것만으로 가상현실에 입장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사용자의 시각 인지와 가상 공간의 반응 속도가 현실과 괴리를 일으키며 발생되는 VR 멀미는 VR의 대표적인 부작용 중 하나다. 과거 VR 멀미는 보통 기기의 부족한 하드웨어 성능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HMD의 평균 성능이 많이 향상된 지금도 멀미를 유발하는 요인이 사용자마다 모두 달라 극복이 쉽지 않은 문제다.

사실, 가장 이상적인 VR은 아예 뇌와 컴퓨터를 직접 연결해(Brain-Computer Interface, BCI) 모든 감각을 속이고 오롯이 가상 세계에만 집중할 수 있는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유명 게임 판타지 소설 <달빛조각사>에 등장하는 전신 캡슐형 접속 기기 등이 그런 미래를 묘사하고 있지만, 뇌와 컴퓨터가 신호를 주고받는 기술은 아직 기초 연구단계에 머물러 있어 실현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게임, 성인물로 대표되는 소비자용 VR

게임은 소비자용 VR 컨텐츠의 대표주자다. 작게는 HMD를 착용하고 간단한 제스처와 터치로 진행하는 게임부터 전용 컨트롤러를 쥐고 정해진 공간을 이동하며 현실감을 높인 게임, 아예 놀이공원의 어트랙션처럼 중대형 기기에 올라앉아 몸 전체로 느낄 수 있는 고급형 VR 게임도 존재한다. 개인용 VR 게임은 주로 오큘러스나 삼성처럼 VR 기기를 판매하는 업체의 자체 앱 장터, 혹은 유명 게임 플랫폼인 밸브의 스팀(Steam) 등에서 유통하는 게임이 대부분이다.

VR 게임은 고급 PC 게임과 비교하면 아직 완성도가 낮다는 평이 많지만, 이를 선제적으로 사업화하려는 기업들의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업이 한국의 ‘VR방’이다. PC방처럼 고성능 VR HMD와 게임을 한데 모아두고 시간별 요금을 받는다. 요금은 상대적을 비싸도 사용자로서는 하드웨어 구입 비용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VR 게임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VR 마니아들이나 커플들에게 이색 데이트 코스로 좋은 평을 받고 있으며, VR 게임 대중화에도 일조하고 있다.

여기서 덩치를 키워 아예 놀이동산 느낌의 ‘VR 테마파크’를 운영하는 사업도 있다. 앞서 언급한 어트랙션 수준의 실감형 VR 콘텐츠는 대체로 VR 테마파크나 관련 행사장에 가야 체험할 수 있다. 눈과 귀를 속이는 수준을 넘어 몸이 함께 반응하고 일부 환경 연출(물이나 바람, 열 등)까지 제공하기 때문에 현존하는 VR 콘텐츠 중 가장 높은 몰입 경험을 선사한다. 업체 입장에서도 일반 놀이공원과 비교해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고 소비자 입장에서도 쾌적한 실내에서 이용할 수 있어 접근성이 뛰어나다.

국내 VR 테마파크 ‘몬스터VR’이 제공하는 어트랙션들 (사진=몬스터VR 홈페이지)

한편, 게임이 누구나 대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콘텐츠라면, 성인용 VR 콘텐츠는 다소 은밀하지만 꾸준한 수요와 함께 다소 주춤한 소비자 VR 시장의 성장을 이끌고 있는 주요 콘텐츠 중 하나다. 올해 미국의 리서치 회사인 루프벤처스가 전망한 2025년 성인용 VR 영상 시장 규모는 무려 14억 달러다. 이는 2년 전과 비교해도 무려 15배나 증가한 규모다.

주요 사업 국가는 포르노가 합법인 일본과 미국이다. IT 분야의 최대 연례행사 중 하나인 CES의 올해 행사에서는 미국의 성인 콘텐츠 업체 ‘너티 아메리카(Naughty America)가 전시관에서 실제 19금 VR 영상 콘텐츠를 시연했을 만큼, 성인용 VR은 일반적인 인식처럼 음지에 있는 사업이 아니다.

미국의 투자은행 파이퍼 재프리 역시 2025년 성인 VR 시장을 비디오 게임(14억 달러) 풋볼 중계(12억 3000만 달러)에 이어 3번째로 큰 산업(10억 달러)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성인 콘텐츠 특유의 폐쇄성과 문화적 인식 등의 문제는 남아있겠지만 성인용 VR은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소재로써 게임, 스포츠와 함께 VR 산업 성장을 주도하는 주요 카테고리 중 하나로 성장할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2번, 3번 찾도록 하는 것이 숙제

소비자용 VR이 넘어야 할 산들도 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부분의 문제는 역설적이게도 짧은 몰입과 기대에 못 미치는 현실감이다. 흔히 VR 테마파크에 다녀온 사람들은 일반 놀이동산과는 달리 같은 기기를 2~3번씩 이용하진 않는다고 말한다.

처음 콘텐츠를 즐길 땐 360도로 펼쳐지는 전경, 새로운 자극 등으로 인한 재미를 느낄 수 있지만, 아직까진 배경 구현 수준과 조작 환경이 ‘가상현실’이란 세계에 대해 막연히 기대했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서 처음의 몰입과 흥미가 장시간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품질을 높이기 위한 VR 콘텐츠 제작 비용도 같은 내용의 일반 게임보다 훨씬 비싸다. 결국 투자와 이익의 손익분기점이 불안정한 상태라는 이야긴데, 이런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소비자용 VR 역시 과거 3D TV의 ‘반짝 흥행 후 몰락’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도 있다.

 

현장 교육에 강점을 보이는 산업용 VR

산업 현장에서 VR은 주로 안전과 전문기술 교육에 활용된다. 가상환경의 장점을 살려 실제 경험하기 힘든 상황에 대한 간접체험 기회를 제공하거나, 복잡한 전문 기술에 대한 실습 교육을 부담 없이 진행할 수 있다. 물론 실경험에 비할 순 없지만, 글이나 사진, 영상만으로 익히는 것보다 현실성이 높고 부담 없이 반복 학습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효과가 있다.

이에 최근 VR 안전교육을 도입하는 회사와 지자체가 늘어나는 추세다. 대림산업은 올해 초 경기 용인시 처인구 대림교육연구원 부지에 ‘안전체험학교’를 개관했다. 지상 2층, 1173.5㎡(350형) 크기의 이 대규모 공간은 대림그룹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안전 교육을 실시하는 곳이다.

대림산업 안전체험학교 실습 현장 (출처=대림산업)

총 19개의 교육과 체험 시설로 구성된 안전체험학교에서는 VR 장비를 통해 교육생들이 직접 굴착기나 크레인 같은 대형 장비와 고위험 작업을 체험해볼 수 있다. 특히 건설 현장의 5대 고위험 작업으로 꼽히는 고소 작업, 장비로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양중작업, 굴착, 전기, 화재 작업 등을 VR 환경에서 미리 체험해봄으로써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할 수 있다.

서울시 역시 2018년 9월 VR 안전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해 같은 해 10월 별내선 건설공사 현장근로자 48명을 대상으로 시범 교육을 실시한 바 있다. 만족도도 높았다. 서울시는 교육 후 설문조사 결과 ‘매우만족’ 비율이 83%, ‘보통’이 17%로 나타났으며 ‘미흡’은 0%였다고 밝혔다.

의료 분야에서의 도입 역시 활발한 편이다. 큰 비용이 수반되는 의료 서비스 교육에서는 VR을 이용해 인체 장기를 실제에 가깝게 재현하고 교육생이 수술 과정을 VR로 체험해볼 수 있도록 하는 식으로 실제 실습 전 교육 효과를 높일 수 있으며, 정신치료에도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VR을 이용한 정신 치료는 기술 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던 1997년에도 베트남 참전 용사들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치료에 활용돼 유의미한 효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PTSD 치료에 활용된 ‘버추얼 베트남’ VR (출처=유튜브 채널 ‘Skip Rizzo’)

VR의 6배 잠재력을 지닌 다크호스, AR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AR)은 가상현실과 달리, 현실 배경에 텍스트나 이미지 등의 추가 정보를 덧입히는 현실 확장 기술이다. 수년 전만해도 꽤 생소한 개념이었으나, 2016년 나이언틱의 AR 모바일게임 ‘포켓몬 고’가 글로벌 흥행에 성공하며 널리 알려졌다.

흔히 몰입경험의 대표주자로 VR을 꼽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실제 VR보다 높은 시장 잠재력을 지닌 기술은 AR이다. 2018년 시장조사기관 디지털 캐피탈(Digital Capital)은 2022년 글로벌 AR/VR 분야의 전체 시장 규모를 1050억 달러(한화 127조 9000억 원)로 전망하며 이 중 AR의 비중을 약 85~90억 달러로, VR을 약 10~15억 달러로 예측했다. 무려 6배나 차이다.

포켓몬 고 플레이 화면 (출처=포켓몬고 홈페이지)

AR은 VR처럼 감각을 완전히 속이는 형태가 아니라 몰입도는 떨어질지 몰라도, 익숙한 현실에 유용한 정보와 시각화를 더해 사용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동영상과 가상현실의 중간 정도 느낌이다. 멀미를 유발하지 않고 배경의 일부만 증강 오브젝트로 대체하기 때문에 기업으로서도 VR보다 제작 부담이 덜한 편이다.

가장 큰 장점은 뛰어난 접근성이다. 고가의 HMD 없이도 스마트폰 하나면 대부분의 AR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배경을 비추고 카메라 속 화면에 증강 오브젝트를 표시하는 방식으로 직관적인 구현이 가능하다. 또 VR HMD처럼 양손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AR 전용 안경도 존재하는데, 지금은 기업용으로만 생산되는 구글 글래스(Google Glass)가 대표적이다.

 

현실의 어느 곳이든 AR은 존재한다

그럼 AR은 어떤 영역에서 활용되고 있을까? 우선 소비자용 AR 콘텐츠는 게임부터, 전시, 패션, 인테리어, 교육 등 일상 중 많은 영역에 AR을 접목할 수 있을 만큼 그 범위가 방대하다.

다만 게임의 경우 포켓몬 고가 크게 성공을 거두며 기대를 모았던 것과 달리, 이후 출시된 AR 게임들은 모두 부진을 면치 못하며 꾸준한 하락세다. AR 게임은 위치/공간 기반으로 넓은 지역을 유저가 직접 돌아다녀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날씨 등 환경 변화에 따라 플레이에 영향을 받고 기존 게임과 비교해도 접근성과 지속성이 떨어진다. 전력 소모가 큰 카메라 사용 빈도도 높아 외부에서의 장시간 플레이도 쉽지 않다. 그렇다 보니 결국 포켓몬 고 이후 구글과 애플의 양대 앱 장터에서 주목할 만한 성적을 거둔 AR 게임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대신 패션이나 인테리어, 교육 같은 기능성 부문에서는 유의미한 진화가 이뤄지고 있다. 특히 패션 시장의 경우 AR 기술로 매장에 방문하지 않고도 옷이나 액세서리를 미리 착용해볼 수 있는 서비스가 빠르게 일반화되고 있다.

명품 브랜드 구찌는 얼마 전 자사 앱을 통해 AR을 이용한 신발 착용 서비스를 출시했다. 기술 스타트업 워너비(Wannaby)와 협업한 이 아이폰용 앱은 사용자의 발을 카메라로 비추면 구찌의 대표 스니커 에이스(Ace)’가 사용자 발에 최적화돼 착용된 모습을 실사 수준의 고품질 이미지로 보여준다.

이 상태에서 어떤 옷과 어울리는지, 실제 모양 등은 어떤지도 미리 살펴볼 수 있다. 또 다른 브랜드 자라(ZARA)의 경우, 작년에 신사동 매장에서 AR 앱을 통해 실제 매장 내에서 자라의 의류 아이템을 갖춰 입은 모델과 모델의 워킹을 직접 확인해볼 수 있도록 하는 체험행사를 진행한 바 있다.

구찌의 AR 신발 착용 서비스 (출처=구찌)

인테리어 부문에서도 형태는 비슷하다. 실제 구입과 배치, 환불 과정이 쉽지 않은 가구를 AR로 집 안에 미리 배치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북유럽 대표 가구 브랜드인 이케아(IKEA)의 ‘이케아 플레이스(IKEA Place)’가 대표적이다.

이케아 플레이스는 약 7000종이 넘는 이케아의 광범위한 포트폴리오를 하나의 앱에 담아 제공하는데, 사용자는 앱을 열고 원하는 제품을 선택한 뒤 방안을 비추면 실물 크기의 가구가 방 안에 배치된 모습을 미리 확인해볼 수 있다. 특히 부피가 큰 가구의 경우 구입 전 미리 사이즈와 부피를 예측할 수 있어 혹시 모를 낭패를 면해준다.

이케아 플레이스 데모 화면 (출처=이케아)

AR을 활용한 교육은 대체로 유아용 교구나 수업에 생동감을 더해준다. 빅토리아 프로덕션의 ‘태그미 3D’는 책 속의 단어 그림을 AR 앱으로 태깅하면 단어 속 사물이 3D 형태로 증강돼 눈 앞에 펼쳐지는 유아 교육 서비스다. 손바닥 위에 그림책 속 등장인물이 나와 이야기를 펼쳐가거나 정지된 그림 형태의 책이 증강현실 영상으로 구현돼 재생되기도 한다. 이와 비슷하게 AR은 각종 디지털 기기의 등장으로 집중력이 떨어진 요즘 아이들의 이목을 끌고 창의력을 자극할 수 있는 콘텐츠 기반으로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애플도 AR 플랫폼 개발에 특별히 공들이고 있는 기업이다. 애플은 자체 개발한 AR 콘텐츠 개발 플랫폼 ‘AR키트’를 매년 발전시키고 있다. 여러 명이 하나의 AR 환경을 공유하는 다중 사용자 기능과 고품질 렌더링, 3D 물체 감지 기능 등을 탑재한 애플의 AR 키트는 차세대 소비자용 AR 콘텐츠 시장에서 새로운 킬러 서비스를 만들어 낼 유망주 중 하나로 꼽힌다.

 

제조 현장 속 AR, 그리고 MR의 가치

사실 AR이 진짜 고부가가치를 지닌 영역은 제조산업 현장이다. 주로 작업자가 AR 안경을 착용하고 전용 AR 솔루션을 사용해 각종 업무 효율을 개선하는 형태다. 고도의 배경지식이 필요한 제품 조립 가이드나 유지보수, 원격지원 등의 작업 환경이 실시간 증강 정보 출력, 공유를 통해 한층 강화된다.

포르쉐가 2018년 공개한 ‘테크라이브룩(Tech Live look)’ 서비스는 자동차 정비에 AR 기술을 접목해 실시간 원격 통신, 매뉴얼 확인 등의 기능을 이용할 수 있는 정비 시스템이다. 정비사가 AR 안경을 착용하면 대기 중인 포르쉐 전문 기술자와 원격으로 연결되는데, 이를 통해 실시간으로 화면을 공유하며 기술자에게 정비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문서나 도면을 공유할 수도 있으며, 포르쉐는 테크라이브룩 도입 시 수리 시간이 40% 감소하고 그에 따른 수리 비용도 크게 낮아진다고 설명했다.

포르쉐 테크라이브룩 사용 현장 (출처=유튜브 채널 ‘Road Show’)

여기서 한 발 더 나가면 AR과 VR의 개념이 더해진 혼합현실(Mixed Reality, MR) 영역으로 접어든다. MR 역시 산업계의 유망 기술이다. 혼합현실은 현실 세계에 정교한 AR 객체를 소환해 가상 환경을 구축하고, 이를 사용자가 손으로 직접 조작하며 실시간 상호작용하는 개념이다. 이를 지원하는 대표적인 기기가 바로 마이크로소프트의 홀로렌즈다.

올해 공개된 홀로렌즈2는 전작에 비해 하드웨어와 사용성이 크게 개선되며 주목받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객체를 손으로 잡아 늘이거나 줄이고 돌리는 행동이 가능하고, 가이드 앱을 통해 특정 물건에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떻게 만드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다. 시선 추적 기능을 탑재해 사용자가 현재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부분에 대한 추가 정보를 제공하고 사용자 이동에 따라 객체의 위치를 조정하기도 한다. 자유로운 조작을 위한 음성 명령도 지원하는 등 제조 산업 전반과 의료 수술 등 정교한 작업에서 사용자를 보조할 수 있는 특화된 기능을 모두 갖춘 셈이다.

MS 홀로렌즈 산업현장 사용 데모 (출처=마이크로소프트)

마이크로소프트는 홀로렌즈의 이런 기능을 십분 활용해줄 여러 B2B 파트너 기업과의 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올해 MWC 2019에서는 PTC와 손잡고 PTC의 산업용 AR 플랫폼인 ‘뷰포리아(Vuforia)’를 홀로렌즈2에 빌트인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산업용 AR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알아보고, 아예 기업용 AR 콘텐츠 제작을 도와주는 솔루션도 있다. 국내 AR 전문기업 버넥트(Virnect)는 올해 산업 현장에서의 업무 전달력을 높일 수 있는 AR 콘텐츠 자체 제작 솔루션 버넥트 메이크를 공개했다. 버넥트 메이크는 기업이 현장에 필요한 정보를 직접 AR 매뉴얼로 제작할 수 있도록 돕는다.

기존 책자 형태의 매뉴얼과 달리 AR로 만들어진 매뉴얼은 실제 설비를 눈앞에 두고 정비 과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작업 방법과 주의사항 등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때문에 업무 속도와 정확도, 숙련도 상승에 효과적이다. 버넥트는 버넥트 메이크로 AR 매뉴얼을 제작할 경우 외주 제작에 비해 비용을 약 95% 이상 절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밖에 ‘홀로그램(Hologram)’ 기술 역시 속도는 느리지만 산업 현장에 적용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루킹 글래스 팩토리(Looking glass factory)가 공개한 ‘루킹 글래스 프로(Looking Glass Pro)’는 비즈니스 환경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수준의 완성도를 갖고 있다.

루킹 글래스 프로 데모 (출처=루킹 글래스 팩토리)

15.6형 3840x2160픽셀 해상도의 디스플레이로 3D 입체 홀로그램을 구현하며, 별도의 디스플레이로 내비게이션 기능을 제공한다. 다양한 홀로그래픽 라이브러리와 함께 유니티나 언리얼 같은 유명 3D 엔진을 통한 홀로그래픽 앱을 제작할 수 있다. 물론, 아직 비즈니스 현장에 전격 도입할 만큼의 수준은 아니지만 루킹 글래스 팩토리는 이 제품이 의료, 3D 설계, 건축, 제조, 교육, 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몰입경험의 화룡점정, ‘오디오’

진정한 몰입경험의 완성을 위해선 현실감 넘치는 오디오도 뒷받침돼야 한다. 오디오는 그 자체론 의미가 없지만 VR이나 AR의 시각 효과와 만나면 현실감을 극대화하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오디오 업체들이 최근 360도 사운드 기술을 비롯해 사용자 위치에 따라 입체감을 증폭시키는 각종 몰입형 3D 오디오 기술 개발에 집중하는 이유다.

올해 CES 2019에서는 각종 몰입형 오디오 기술이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소니는 목소리와 코러스, 악기 등 음향 요소에 거리·각도·위치 등의 정보를 추가해 사용자에게 능동적으로 들려주는 ‘360도 리얼리티 오디오(Reality audio)’ 기술을 선보였고, 네덜란드 반도체 업체인 NXP반도체도 사용자의 공간을 인식해 음향 배치를 최적화한 다차원 몰입형 오디오 솔루션 ‘이머시브3D(Immersive 3D)’를 공개했다.

증강 오디오 기술 ‘AMBEO’를 개발하는 젠하이저도 LG전자와 협업해 AMBEO 사운드바를 선보였다. AMBEO 증강 오디오는 작년 가을 AR 헤드셋 ‘매직리프 원(Magic Leap One)’에 최적화된 헤드셋 AMBEO AR One에 탑재된 기술이다. 이 기술은 실제 외부 사운드와 이어폰의 가상 오디오를 자연스럽게 섞어 새로운 공간감을 형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말 그대로 ‘듣는’ 증강현실인 셈이다. 이런 몰입형 오디오는 특히 VR 영상이나, 현재 위기에 처한 AR 게임에 현장감을 더해줄 든든한 지원 기술로 기대되고 있다.

젠하이저의 증강 오디오 이어폰 ‘AR One’ (출처=젠하이저)

지금까지 더 나은 몰입경험을 위한 가상, 증강, 혼합현실, 그리고 3D 오디오 기술 사례들을 알아봤다. 한편으론 우리 감각의 통제권을, 나아가 미래엔 감정의 입력마저 외부 기기에 의존하는 시대가 오는 건 아닐까란 걱정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변화를 받아들이고 취사선택할 여유는 아직 충분하다. 몰입 경험이 제안하는 감각의 변화 앞에서 긍정적인 건 취하고, 부정적인 건 과감히 버릴 수 있는 눈을 지금부터 키워나가면 된다.

 

- 이 글은 테크월드가 발행하는 월간 <EMBEDDED> 2019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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