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별 산업구조에 따라 주력 품목 달라 대혼전 양상

[테크월드=김경한 기자] 전세계 반도체 산업에서 우리나라는 미국(52%) 다음으로 두 번째로 높은 19%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할 정도의 반도체 강국이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는 많다. 메모리 반도체에서는 1위 국가지만, 정작 시장이 1.5배 더 크며 매년 성장세가 뚜렷한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에서는 그 존재 자체가 미미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주기적으로 변동 폭이 심해 항상 불안요소를 안고 있다. 또한 파운드리 시장에서는 대만의 TSMC라는 절대 강자가 자리잡고 있으며, 디스플레이 시장은 기술 정체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정부와 국내 업체들은 반도체 각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주도하기 위해 과감한 투자를 하고 있으나 현실은 녹록치 않은 상황이다. 

한국, 메모리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서 강세 유지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 한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 절대 강자의 자리를 굳히고 있다. D램(RAM) 시장에서는 2018년 4분기 삼성전자(39.9%)와 SK하이닉스(31.9%)가 71.8%라는 압도적인 점유율로, 낸드 플래시(Nand flash)는 삼성전자(30.4%)와 SK하이닉스(11.2%)가 41.6%의 점유율로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가 메모리 반도체를 리드하는 이유는 산업 특성에 기인한다. 메모리 반도체는 미세공정을 통해 원가절감을 해야 제조기술 경쟁력을 갖출 수 있고, 우리나라의 대기업과 같이 대규모 설비투자가 가능할수록 유리한 면이 많기 때문이다. 

시스템 반도체에서는 우리나라 기업이 맥을 못 추는 상황이다. 시스템 반도체는 거대한 장치산업인 메모리 반도체와는 달리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갖춘 고급 설계 인력이 필요한데, 이는 기존 우리나라가 구사하던 패스트팔로워(Fast follower) 전략과는 상반된 전략을 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 50위권 내에 우리나라 팹리스 업체는 실리콘웍스 한 곳만 있을 정도다. 정부는 ‘시스템 반도체 비전과 전략’, 삼성전자는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하며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할 계획임을 밝혔다. 발표가 난 지 채 1년도 안 돼 삼성전자가 미국의 CPU 코어 개발 사업부를 정리하는 등 삐걱대는 형국이지만, 향후 10년의 준비기간을 묵묵히 지켜보는 수밖에 뾰족한 해법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파운드리 업계는 국·내외 정세에 눈치만 보다가 한 단계 더 도약할 시기를 놓쳤다는 평을 받고 있다. 우리 업체가 주춤하는 사이, TSMC는 지난 11월 초 3nm 공정 개발을 위해 연구원 8000여 명을 충원하고 EUV 장비를 대량 구매하는 등 공격적으로 행보를 이어갔다.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 정은승 사장이 ‘삼성 파운드리 포럼 2019 코리아’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중국 시안과 경기도 평택에 웨이퍼 3만 장 생산 규모의 2기 공장을 신규 건설 중이고, EUV 장비를 대거 사들이는 등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으나 공장 가동 시기에 있어서는 확답을 못하는 등 그 행보에 있어서는 조심스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EUV 노광장비를 사용하는 초미세공정에 대한 방향성조차 잡지 못한 상황이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메모리 반도체는 시스템 반도체를 위탁생산하는 파운드리와는 달리 아직 2년 정도의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고 해명했다. 2년 이라는 기간이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으나 유비무환의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가늠해 본다. 

삼성 디스플레이와 LG 디스플레이는 신기술을 활용한 프리미엄 디스플레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삼성 디스플레이는 지난 10월 2025년까지 QD(양자점 물질) 디스플레이 생산시설 구축과 연구개발에 총 13.1조 원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LG 디스플레이는 지난 10월 초 LCD 사업을 축소하면서 임직원 25%를 감축하는 조직개편을 단행하고 본격적으로 OLED와 중소형 P-OLED 사업 분야를 확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양사는 QLED와 OLED 다툼으로 소모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 중국 업체가 LCD를 넘어 OLED 영역으로 침범하는 틈을 주는 게 아닌가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중국, 미국과 갈등으로 주춤하나 무시할 수 없는 저력 보유
거대 시장을 보유한 중국은 반도체 산업에서 무시할 수 없는 국가다. 이미 지난 2014년에 ‘중국제조 2025’를 발표하며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 75%를 목표로 반도체 굴기를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218억 달러(약 25조 6800억 원) 규모의 펀드를, 2018년에는 3000억 위안(약 51조 원) 규모의 반도체 산업 펀드를 조성했다. 이런 투자 덕분에 2018년의 중국 내 반도체 생산 규모는 2014년에 비해 2배 이상 확대됐으나, 여전히 반도체 자급률은 15.4%에 그치고 있다. 

거대한 투자에 비해 중국의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정체기에 있는데 이는 미국의 견제로 수출길과 해외 기술 유입 경로가 차단됐기 때문이다. 이에 중국의 반도체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인수합병을 노리고 있지만 이 마저도 미국 정부의 저지로 무산됐다. 

결국 중국은 해외 고급 인력을 흡수해 제조 기술과 노하우를 습득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나라 기업에게 상당한 위협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은 아직 D램이나 낸드 플래시 공정에서 이렇다할 성적이 나오지 않고 있으나, 14억 명이라는 거대시장을 보유한 국가이기에 양산에 성공하면 승부수를 걸어볼 만한 메모리 반도체의 특성상 항상 예의주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팹리스 산업은 세계 10위권에 하이실리콘과 유니그룹 두 업체를 올렸을 정도로 우리 기업보다 앞서 있다. 우리나라는 10위권 업체는 아예 없을 뿐만 아니라, 50위 권 내에 실리콘웍스 한 곳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나라가 100개 미만의 팹리스 업체를 보유하고 있는 반면, 중국은 1600여 개의 업체를 보유하고 있다. 중국의 팹리스가 성장한 이유는 세계 1위 파운드리 국가인 대만과의 활발한 산업협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미국과의 무역분쟁으로 미국뿐만 아니라 미국 우방국으로의 수출길이 막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국은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OLED 분야를 공략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샤오미 TV부문 리샤오솽 총경리는 지난 11월 10일 내년 1분기에 OLED TV를 출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미 하이센스는 유럽 시장에 OLED TV를 출시했을 정도다. 

특히 중국이 전 세계 중·저가 디스플레이 시장을 장악하는 점은 국내 기업에게 위기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중국 기업의 저가 물량 공세는 오히려 발목을 잡기도 했다. BOE의 경우, 저가 물량공세로 재고가 누적됐으며 이로 인해 판가가 대폭 하락해 올해 3분기 적자를 면치 못했다. 

 

대만, 시스템 반도체가 앞에서 끌고 파운드리가 뒤에서 밀고
시스템 반도체에서는 세계 4위권의 미디어텍을 보유한 대만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대만의 시스템 반도체가 강한 이유는 든든한 파운드리 업체가 뒤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만은 미국 정부의 ‘설계는 미국, 제조는 해외’라는 반도체 정책에 힘입어 파운드리 산업이 부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만은 자칫 정세 변화로 미국의 팹리스 업체가 주문을 멈출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이에 대만 정부는 2001년부터 Si-Soft(Silicon Software)라는 사업을 통해 대대적으로 시스템 반도체 투자 지원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또한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가 있던 대만이기에 팹리스와 파운드리가 연계해 생산한 시스템 반도체를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에 판매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반도체를 위탁생산하는 파운드리 시장은 대만의 TSMC가 절대강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트렌드포스(TrendForce)에 따르면, 2019년 1분기 세계 파운드리 시장은 TSMC가 48.1%, 삼성전자가 19.1%를 차지했다. TSMC는 파운드리 사업을 처음으로 시작한 만큼 선점효과가 있었으며, 중국으로 진출해 막대한 매출과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업체는 중국 현지 업체와의 협업을 통해 공동 생태계를 구축하며, 파운드리 산업의 실 비중의 절반가량을 중국에 배치했다. 올해 3분기 매출액은 역대 최고인 2930억 5000만 달러(약 11조 3000억 원)를 기록했으며, 이는 전년 동기 대비 12.6% 증가한 수치다. 

‘터치 타이완 2019’에 전시된 마이크로 LED 제품

대만은 LCD를 이을 기술로 미니 LED에 주목하고 있다. 미니 LED는 100마이크로미터 정도의 LED 소자로 구성된 백라이트를 LCD와 함께 사용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을 대만은 선제 도입했으며, 중국으로 기술이 확산되고 있다. 
향후 주목해야 할 기술로는 퀀텀닷 OLED와 미니 LED보다 더 작은 소자를 사용하는 마이크로 LED가 있으며, 대만을 비롯한 동아시아 4개국은 이 기술의 선점을 위해 다각도로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일본, 메모리 반도체 실패를 시스템 반도체로 극복
메모리 반도체에서는 한·미·일 연합체에 의해 2018년 기사회생한 도시바가 낸드 플래시 부문에서 세계 시장점유율 2위를 기록하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980년대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를 호령하던 일본으로서는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일본은 소리소문 없이 시스템 반도체에서 소기의 성과를 내고 있다. 전력을 제어하는 파워 반도체 분야에서는 세계 3, 4위권 업체를 두 개나 보유하고 있으며 꾸준히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2016년 소프트뱅크가 ARM 홀딩스를 인수한 점은 매우 중요한 터닝포인트로 여겨진다. 스마트기기와 모바일 기기의 AP에 탑재되는 코어의 대부분이 ARM 코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IHS 마킷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전세계 TV 시장에서 소니가 12%, 파나소닉이 10%의 매출 성장을 기록했다. 하지만 양사의 OLED TV 패널은 LG 디스플레이를 사용한다는 점은 눈 여겨 볼만하다. 일본은 2020년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하이엔드급 프리미엄 TV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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