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전자부품 업계의 지형 구조는 克日의 역사, 그 자체

[테크월드=박지성 기자] (편집자주: 한장TECH는 테크월드 기자들이 주요 뉴스를 한 장의 슬라이드로 제작하여 제공하는 테크월드만의 차별화된 독자 콘텐츠입니다.)

 

일제(日製)는 최일류였다. 냉장고, 텔레비전과 같은 가전제품은 물론이고 산업용 제품들의 경우, 일제는 제품 품질에 대한 일종의 보증수표였다. 특히 전자부품 업계에서 일본의 입지는 강건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테크월드 뉴스는 약 30년 전부터 월간 전자부품이라는 산업 전문지를 발행해 왔다. 당시 월간 전자부품의 매체 제호는 일본의 느낌이 나는 한자로 디자인됐다. 월간지 기술 기고의 절반 이상이 제휴를 맺은 일본 연구소 혹은 기업에서 넘어왔다. 그래야만 팔리던 시대였다. 그렇게 우리는 일본 전자산업의 등을 보면 쫓아왔다.

 

 

지난 2019년 7월 1일, 일본 정부는 한국의 주력산업인 반도체에 반드시 필요한 3대 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 강화를 발표했다. 연이어 7월 24일 일본은 추가로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하겠다고 발표했다. 문재인 정부는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며 극일(克日)을 천명했다. 뒤 이어, 삼성전자가 소재, 부품 영역에서 탈일본을 추진한다는 뉴스가 있었고, 정부는 국내 소재, 부품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산업 현장은 이런 선언과 소식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특히나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전자업계에서는 한일 양국의 무역 갈등이 어떤 파장을 낳을지, 그리고 과연 극일이라는 것이 가능할지에 대해 비상한 관심이 모이고 있다. 이에 테크월드 뉴스와 월간 전자부품은 한장 TECH 시리즈를 통해 국내 전자산업 업계의 현황을 진단해 보고 올바른 대응책을 강구해 보고자 한다.

 

ㅇ 반도체, 디스플레이, 휴대폰에 지나친 쏠림

극일이 가능한지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일단 스스로에 대한 진단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국가통계포털의 집계치를 활용해 본지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전자부품 등을 포함한 국내 정보통신방송기기의 총 생산액은 2017년 342조 7천억원에 달했다. 국내 ICT 산업 생산 총액의 약 72%를 차지하는 수치다.

그림 1. 한국 정보통신산업기기 2017년 기준 총생산액 및 산업별 비중

 

방대한 ICT기기 산업은 200여 개에 가까운 세부 제품과 업종으로 구분이 가능하지만, 세부 구분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그림 1]의 그래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쏠림 현상이 매우 뚜렷하기 때문이다. 전체 생산액 중 66%가 3개의 산업에서 발생하고 있다. 반도체가 34%, 디스플레이가 20%, 휴대폰을 포함한 무선통신기기가 12%의 순으로 중요 축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주요 수출품목들이 국내 전자부품 산업을 떠 받치는 핵심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명암 역시 드러난다. 정부가 집중 육성을 발표한 뿌리, 기간 산업이라 할 수 있는 센서, PCB, 수동부품 등의 산업은 전체 산업 비중에서 한 자릿 수의 미약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영역에서 일본의 기술력은 압도적이다.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는 중국 제품을 당해낼 수가 없다. 극일은 허망한 구호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ㅇ 쏠림 구조는 분명 문제이나, 그 자체가 극일의 역사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국내 전자부품 산업의 현재 구도는 그 자체가 바로 극일의 역사이기도 하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휴대전화는 일본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좌우하던 영역이었고, 한국 기업들은 그런 일본 기업을 추격, 추월하면서 현재와 같은 산업 구조를 쟁취해 냈다.

 

▲ 비웃음을 샀던 반도체 산업 진출, 세계 1위가 되다.

우선 반도체를 살펴보자.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1위를 자랑하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일본의 비웃음 속에서 시작했다. 1983년 삼성의 고(故) 이병철 회장은 도쿄 선언을 통해 한국의 반도체 산업 진출을 본격화 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반도체 기업들을 밀어내고 세계 반도체의 선도국가로 자리매김한 일본은 이런 삼성과 한국의 도전이 필패로 끝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도 그럴 것이 1988년, 일본은 전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 51%를 차지하고 있던 반면 당시 한국의 반도체 수출액은 1조를 갓 돌파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로 진입하면서 전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개인용 컴퓨터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반도체 기술력을 가진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대형 컴퓨터용 고품질 메모리 반도체 개발과 생산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PC의 급격한 확산으로 반도체 업계의 패러다임은 기술보다는 타임 투 마켓과 가격 경쟁력으로 변하고 있었고 삼성전자 등 한국의 후발기업들은 이런 시장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함으로써 시장에서 급격한 성장을 달성한다. 그리고 지속적인 경쟁력 확보를 통해 마침내 한국은 2014년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일본을 밀어내고 시장 2위의 지위를 확보하게 됐다.

 

▲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 일본을 지워 버렸다.

1998년, 전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은 그야말로 일본의 독무대였다. 샤프를 위시하여 소니와 파나소닉 등 일본 기업들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80%대를 자랑했다. 일본의 선도업체 샤프는 LCD 디스플레이를 업계 최초로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TFT LCD 원천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다. 실제로 삼성전자의 추격으로 샤프의 입지가 위태로웠던 2006년 당시 샤프는 삼성전자를 대상으로 대규모의 특허소송을 냈고, 삼성전자는 대거 설계 변경을 해야 했을 정도로 샤프, 그리고 일본의 기술력은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LCD 아니 액정 디스플레이의 역사를 열었던 일본을 대상으로 한 한국의 추격은 맹렬했다. 디스플레이 산업이 촉박할 수 있는 전,후방 산업의 막대한 파급효과에 주목한 한국 정부는 1993년부터 적극적인 R&D 지원 정책을 펼쳤고, 이를 바탕으로 삼성전자와 LG 디스플레이는 2000년대 초반부터 일본 기업들이 미처 대응하지 못한 대형 디스플레이 시장을 선점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스마트 폰의 대대적인 보급과 LED 시대에 도래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면서 마침내 한국은 반도체에 이어 다시 한번 극일을 달성한다. 그리고 2016년 디스플레이 산업의 상징과도 같았던 샤프 전자는 일본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에도 불구, 끝내 재기에 실패하여 대만 홍하이 그룹에 인수되고 만다.

 

▲ 日만의 ‘가라케’ vs 글로벌 ‘갤럭시’

삼성전자가 미국의 애플과 함께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보니, 우리나라에서 일본의 휴대폰 제조업체들에 대한 관심을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폰 등장 이전의 일본 휴대폰 기술력은 다른 전자 산업과 마찬가지로 세계 선도급 이었다. 2000년 일본 샤프전자는 세계 최초로 카메라를 탑재한 휴대전화를 내놓았고, 아이폰이 나오기 전인 2006년에 일본의 휴대폰 사용자들은 불편함 없이 휴대전화로 TV를 시청할 수 있었다.

반면 국내의 삼성전자는 1996년 이건희 회장의 결단으로 유통 중이 애니콜 물량을 전부 파기해야 할 정도로 품질적인 이슈에서 넘어야 할 산이 많았고, 글로벌 시장에서의 입지도 강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폰으로 대표되는 스마트폰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한국과 일본 기업들의 운명은 희비쌍곡선을 교차하게 된다.

한국 기업들은 발 빠르게 스마트 폰 체제로의 전환을 추진, 성공 시키며 글로벌 휴대폰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한다. 반면 일본의 휴대폰 제조기업들은 내수 시장에 갇혀 버리게 된다. 일본 기업들은 세계 표준이 아닌 일본 자체 표준에 최적화 된 휴대폰을 생산하며 시장에서 뒤쳐지고 만다. 그 결과 태평양의 외딴 섬 ‘갈라파고스’와 일본의 휴대폰을 뜻하는 단어 ‘케타이’가 합쳐진 ‘가라케’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스마트 폰 갤럭시는 이제 단순한 한 회사의 브랜드라기 보다는 글로벌 안드로이드 폰의 대명사가 됐다.

 

ㅇ 극일은 가능한가?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구호는 뜨겁다. 하지만 산업의 현실은 냉정하고 차갑다. 혹자들은 한국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휴대폰 정도만 글로벌 선도 수준이지 나머지는 모두 일본에 의존적이라며 극일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보낸다.

그러나 앞서 본 것과 같이, 한국의 현재 산업 구조는 그런 극일의 역사의 산물 그 자체이다. 따라서 지금 현 단계에서 단편적 요소만을 바라보고 탈일본은 어렵다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 있어 보인다. 지금은 한국 전자산업을 만들어 낸 극일의 사례를 통해서, 부품/소재 영역에서의 진정한 탈일본 가능성을 냉정하게 탐색해야 할 시점이다.

 

'한국 전자부품 산업, 극일은 가능한가'는 다음주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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