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업군 양성을 위한 강력한 컨트롤타워 부활 필요해

[테크월드=이건한 기자] 

“늦었지만 ‘소재부품’을 해야 할 때입니다. 소재부품을 살리기 위한 ‘생산기술’에 매진해야 합니다. 기본과 기초에 집중하는 길 만이 소재부품을 살리고 대일역조개선의 실마리라도 살리는 길입니다”

2008년, 당시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중소기업지원본부장이었던 이덕근 현 한국기술거래사회 수석부회장은 테크월드가 발간하는 월간 <전자부품(EPNC)> 2008년 6월호 특별기고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당시의 기고는 ‘제40회 한일경제인회의’에서 비중 있게 다뤄졌던 한일 간 무역역조 현상에 대한 이 부회장의 진단이었다. 그는 당시 “일본은 ‘소재부품’이라고 부르고, 우리는 ‘부품소재’로 부른다”며, “우리는 소재를 제품의 한 부분으로 보고 수직계열적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에서 시작했지만 일본은 제품의 근원인 소재로부터 부품이 만들어진다는 발상으로 출발했던 것이 차이”였다고 이야기했다.

별것 아닌 호칭 문제에 불과한 듯해도, 이런 생각이 한국과 일본이 부품과 소재 산업의 해법을 찾는 방법론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다.

이덕근 한국기술거래사회 수석 부회장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2019년, 한국은 일본과의 외교적 대립으로 인한 일본의 주요 소재 수출규제 조치로 적잖은 위기를 맞이하게 됐다. 타격은 주로 한국 경제의 한 축을 지탱해온 반도체 산업에 집중됐다. 한국은 오랜 시간 반도체 제조의 핵심 소재인 고순도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의 대다수를 일본 기업에서 수입해왔는데 느닷없는 수출 규제로 인해 이들 소재의 수급이 난관에 부닥친 것이다.

그동안 한국은 일본에서 수입한 소재에 우리 기술을 얹어 일류 반도체를 만들고, 일본 기업은 그런 우리 기업에 소재를 팔아 이익을 얻었다. 나름의 경제적 선순환이었다. 서로 잘하는 것에 집중하자는 이런 기업 간의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어 보인다. 하지만 양국의 자존심 싸움은 이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로 만들고 있다.

다행히 우려와 달리 국내 기업이 당분간 사용할 소재가 확보되고, 일부 공정부터 국산 소재로의 대체가 성공하고 있다는 소식들이 들려오며 당장의 위기는 넘긴 모양새다. 그렇다면 다음은 본격적인 장기전을 준비할 시기다. 이와 함께 ‘한국의 부품소재, 일본의 소재부품’이란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과연 우리는 일본에 대한 소재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 우리에게 지금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덕근 수석부회장을 다시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월간 전자부품(EPNC) 2008년 6월호 中 - 테크월드 발행

Q. 이 부회장께서 과거 기고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일본의 소재우선 전략에 발맞춰 우리도 원천기술 개발에 힘써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 뒤로도 비슷한 조언을 해왔고, 2006년에는 ‘왜 다시 소재부품인가’란 책을 내기도 했다. 지난 10년의 한국 소재 산업이 걸어온 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2001년, 부품소재전문기업 육성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됐었다. 그 당시 특별법은 신기술 개발에만 중점을 둔 게 아니라 부품소재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기업군, 대형 전문기업을 육성하겠다는 취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많은 관심을 쏟았던 강력한 컨트롤타워 아래 관련 기술 개발과 인력 지원, 테스트베드, 민간투자 연계, 신뢰성 검증 등이 유기적으로 흐르는 구조였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2009년 공공기관 선진화 정책에 의해 컨트롤타워 내 핵심 부서들이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AT)과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로 분리되며 시스템은 추진력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이후 정권들도 이 영역엔 다시 관심을 쏟지 않았다. 선진화법 취지와 별개로 잘 돌아가던 조직이 흩어져버린 것은 상당히 아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도 있다. 부품소재 산업에는 여전히 연간 3천억 원 이상의 정부 자금이 지원되고 있다. 단일 영역에 대한 투자로 보면 절대 적지 않은 돈이다. 최근 발표된 정부의 R&D 자금 지원 특별대책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기술 개발을 위한 자금 투자에 초점이 맞춰진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지금 일본과의 기술 격차는 예산이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에서 답을 찾을 필요가 있다. 게다가 단순 기술 지원만으론 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이 이를 전부 흡수하기도 쉽지 않다.

현행 부품소재산업 지원 체계와 과거 컨트롤타워 구조 (내용 출처=이덕근)

Q. 현재 중소기업의 인력 문제는 어떤 수준인가?

기술 개발은 원래 기업이 주관하고 대학이나 연구소가 위탁 참여하는 구조다. 그러나 현재 구조에서 중소기업에 아무리 개발비를 투자해도 제대로 된 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현재 국내 기업들이 운영하는 부설연구소는 약 4만 개에 이르는데, 이 중 중소기업이 운영하는 연구소 기준으로 살펴보면 약 83%의 시설이 석·박사 인력조차 없이 운영되고 있는 현실이다.

기업전담 연구조직에 대한 정부의 허가 장벽이 너무 낮은 이유도 있지만, 기업이 정부 사업을 신청하기 위해 이런 부설연구소를 운영해야만 하는 구조도 문제다. 기업이 성장하려면 자금이 필요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연구소를 운영하고 보는 것이다. 그보단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 민간 투자를 연계해주고, 신뢰성 마크(R-Mark) 부여와 테스트베드 역할을 해야 한다. 과거 특별법 제정 당시의 컨트롤타워가 이런 역할을 했다고 보면 된다.

 

Q. 과거와 같은 강력한 컨트롤타워 부활이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컨트롤타워 구성은 정부 차원이 있고, 사업 운영 차원이 있다. 이번 특별 대책에서는 정부 차원의 특별위원회가 꾸려져 부총리가 위원장을 맡고 산업부가 주무 부처, 여기에 과기부, 중소벤처부, 국토부, 고용안정부, 환경부, 금융위 등이 소속된 구조다.

그런데 여기에 갑자기 엄청난 예산이 쏟아져 들어오니 이들 부처 사이에서 이권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제어하기 위한 이상적인 방안은 대통령이 직접 키를 잡는 것이다. 일종의 워룸(War room, 작전상황실)을 꾸려 대통령이 그곳의 수장이 돼야 한다. 정 안되면 국무총리라도 나서야 이들 부처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부품소재발전위원회는 국무총리가 위원장이었다. 나아가 사업 운영에는 지속성과 연계가 필요하고, 실효성도 따라야 한다. 이를 관장하기 위한 기관 설립이 필요해 보인다.

 

Q. 그 외 우리 소재 산업 성장에 필요한 조건은 무엇인가?

컨트롤타워와 별개로, 소재는 대학의 기초연구 성과로부터 얻는 것이 지름길이다. 독일과 일본도 비슷한 전략을 갖고 있다. 수익을 추구하는 기업에 기초 연구를 바라면 안 된다. 독일은 막스플랑크 연구소에 기초 연구를 주문한다. 여기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지만 간섭은 일절 하지 않는다. 같은 독일 내 프라운호퍼 연구소는 산업응용연구소 입장에서 이들 연구 성과가 산업계에 얼마나 쓰이는가를 측정해 인센티브를 받는 구조이다 보니 연구와 지원, 응용의 선순환이 잘 이뤄진다.

즉 기초 연구는 그냥 밀어주고 성과대비 추가 연구비를 지원하는 투트랙 전략이 필요하며, 우리도 이런 방식을 일단 시도는 해볼 필요가 있다. 대학의 연구전담 교수들에게 직접 핵심 과제를 주고 철저하게 맡겨 보라. 연구비를 지원하면 적어도 10년 이내에 성과가 나올 수 있다. 단기 성과 도출에 급급해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Q. 우리가 미처 살펴보지 못한 문제로는 무엇이 있을까?

지금 상황에서 몇 가지 경계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첫째는 방금 이야기한 ‘예산’에만 집중된 시선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것, 둘째는 정부 만능주의 탈피다. 현재 사건의 흐름은 모두 정부 위주로 움직이고 있다. 민간 전문가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최근 들어서야 대학이나 연구소 등에서 기술자문단을 꾸리는 모습이 보이는데, 기본적인 관심이 멀어졌던 탓도 있겠지만 지금부터라도 정부와 민간이 함께 협력하고 함께 위기에 대처할 필요가 있다.

극일(克日)에만 머무르는 것도 금물이다. 그래서는 시야가 짧아진다. 만약 일본을 넘어서고 나면, 그 뒤엔 무엇을 할 참인가? 처음부터 일본을 넘어 글로벌 시장을 바라봐야 한다. 삼성이나 LG, SK, 포스코 같은 우리 기업들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고 이들이 정상을 유지하는 과정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1~2차 벤더 기업들의 역할도 컸다. 단순 기술 개발뿐만이 아니라 앞으론 이런 기업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판을 키워야 한다.

일본과의 거래를 넘어 글로벌을 내다보고 글로벌에서 소싱하며 글로벌 공급 기지의 중심 국가가 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수요 조사도 글로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사실 이번 특별 대책이나 지난 2001년에 제정됐던 특별법도 스탠스가 너무 일본에 맞춰져 있었는데, 이는 결국 단기 대책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

Q. 소재 자립을 위한 기초 체력은 충분할까? 나아가 앞으로 집중해야 할 분야는 무엇인가?

과거 부품소재연구단 소장 시절부터 연구해본 결과 일본에서 수입하는 100개 품목 중 상위 15%는 원천기술의 부족으로 지금부터 개발해도 추격이 쉽지 않다. 연구개발에만 10년, 테스트에 1~3년, 양산까지 1~2년 적어도 10년에서 15년은 걸린다고 봐야 한다.

여기에 일본도 멈춰 있는 게 아니다. 결국 그 분야는 우리가 성장하는 만큼 일본도 함께 성장하는 ‘레드 퀸(Red Queen)’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부가적으로 소재 기술은 물리, 화학, 수학이 기초인데, 우리는 학생들조차 이들 학문을 기피하는 풍조가 짙다.

하지만 따라잡을 수 없는 부분에 목맬 필요는 없다. 하위 20%의 영역은 지금도 당장 개발이나 공급이 가능하다. 단지 이 부분들은 경제성 측면에서 볼 때 외부에서 사오는 것이 타당하고, 그것이 벨류체인상 국가 간 수출입의 균형을 맞추는 길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중간 65%의 영역이다. 이 분야에 역량을 집중해 우리만의 기술력과 영역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럴 능력도 충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은 우리에게 나름의 ‘호재’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아베 정권이 이번 사태를 벌이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소재에 대해 여전히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었을까? 지금까진 너무 무관심했다.

 

Q. 무산될 뻔했던 한일경제인회의가 결국 9월에 서울에서 개최된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과거 그 어떤 회의보다 관심과 무게가 쏠릴 것으로 보인다. 이번 회의에서 오갈 메시지와 분위기를 어떻게 예상하는가?

과거에도 한일관계가 냉랭해지면 경제인들도 위축이 되곤 했다. 특히 일본은 더욱 그런 편이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긍정적인 메시지의 공동성명 정도는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정치는 정치, 경제는 경제, 이런 것 말이다. 아마도 ‘윈윈(Win-Win)’이라는 키워드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가벼운 이야기로, 과거 부품소재 전용 공단이란 제도가 있었다. 일본 기업이 국내로 들어와 세제 혜택 등을 받고 운영하며 단거리 납품 기술 등을 이전할 수 있다는 것인데 가동도 잘 안 되고 별로 관심도 없었다. 과거 한일경제인회의에서도 여러 번 비슷한 이야기가 오간 적이 있지만 한국은 노사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므로 실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보다 사실 이번 회의는 개최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예전에는 소재와 부품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력, 해외 공동투자 등이 주요 의제였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소재부품이 다시 떠오른 건 긍정적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서로의 진면목을 본 이후가 아닌가? 소재가 무기화됐을 때 벌어지는 일들과 영향들, 전략물자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열리는 회의는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고, 현재의 분위기 경색을 해소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생각보다 길어졌던 인터뷰 내내 미처 싣지 못한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이덕근 부회장은 전반적인 상황과 정부의 대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되, 과거 타도 삼성의 기치를 내세웠던 일본의 히노마루(일장기) 프로젝트부터를 지금 사건의 시발점으로 보고 우리도 근본적인 생각과 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핵심은 정부와 기업, 민간, 국제협력, 애로기술 종합 지원 인력 파견 등이 종합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강력한 컨트롤타워의 부활이다.

한국의 부품소재, 일본의 소재부품. 과거의 프레임은 조금 다르게 시작했을지라도 그것이 곧 끝을 결정하진 않는다.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새로운 배도 출항 준비를 마쳤다. 이 부회장의 말처럼, 이번 사태를 계기로 극일을 넘어 세계로 뻗어갈 수 있는 탄탄한 시스템과 리더십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함께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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