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과 뿌리산업 육성 시급

[테크월드=박지성 기자] (편집자주: 한장TECH는 테크월드 기자들이 주요 뉴스를 한 장의 슬라이드로 제작하여 제공하는 테크월드만의 차별화된 독자 콘텐츠입니다.)

 

‘9988’이라는 말이 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가고 싶다는 고령화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기업체 중 99%가 중소기업이고 중소기업이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88%에 달한다는 의미다. (어떻게 해석하든 대한민국이 마주하고 있는 심각한 사회구조적 문제이긴 하다.) 이처럼 산업 생태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소기업이지만, 실질적 부가가치 창출 그리고 수익 배분 구조에서 중소기업의 존재감은 미비한 것이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다.

 

최근 한국 기업에 대한 일본의 무역 갈등이 촉발되면서, 수면 위로 드러난 특이점이 하나 있다. 피해가 예상되는 국내 기업들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같은 글로벌 대기업인데 반해, 충격을 가하는 일본 기업들의 이름은 생소하기만 하다. 스텔라 케미파, 쇼와덴코, 도쿄오카 공업 등, 해당 산업 종사자들이 아니면 낯선 이름의 이 기업들은 모두 일본의 중소/중견기업들이다. 일본 중소기업의 영향력이 글로벌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이처럼, 일본 전자산업의 핵심 경쟁력은 강력한 중소기업들을 통해 발현되고 있다. 그렇다면 국내 전자부품 산업의 현황은 어떠할까?

 

ㅇ 한국의 주력 산업, 중소기업은 없다!!

일단 국내 전자부품 산업의 주요한 특징은 주력 산업과 중소기업 분포에 심각한 갭(Gap)과 미스매치(Mismatch)다. 테크월드 뉴스의 ICT 산업 통계 데이터 분석에 의하면, 국내에서 전자부품과 각종 전자기기를 생산하는 중소기업의 수는 총 8천834개인 것으로 파악됐다. (2017년 기준) 하지만 기업체 수는 압도적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ICT 산업 생산총액 중 중소기업의 매출 비중은 25%남짓에 불과했다.

 

세부 산업별로 중소기업의 매출 기여도를 분석한 결과, 이런 상황은 더욱 심화됐다. 국내 전자산업 중 약 55%의 비중을 차지하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영역에서 중소기업의 매출 기여도는 각각 4.6%, 6.3%로 극히 낮았다. 물론 완제품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의 경우 초대형 생산설비가 필요한 산업이므로 중소기업의 진입에 일부 한계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해당 산업의 생산액 집계에는 유관 부품 및 설계 등의 부가가치 포함된 집계치 임을 감안하면, 중소기업의 매출 기여 수준에는 개선의 여지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국내 주력 산업인 통신기기의 경우, 전체 산업 중 차지하는 비중은 12.2%였으나 중소기업의 매출 비중은 25.3%로 여전히 낮았다.

요컨대, 대한민국 전자부품 산업의 주력은 반도체, 디스플레이, 휴대폰이지만 정작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국내 중소기업들은 해당 산업에서 유의미한 부가가치를 창출하지도, 또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ㅇ 영세한 산업은 중소기업의 몫?

반면, 중소기업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산업들은 모두 영세한 규모를 보였다. 중소기업의 매출 기여도가 가장 높은 방송용 기기 및 장비의 경우, 중소기업의 매출 비중은 97.2%에 달했으나 산업 전체의 생산액은 2.3조원에 불과해 전체 전자산업 중 비중은 0.7%에 그쳤다.

특히 발전 가능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영세한 규모를 보이는 산업도 많았다. 센서, MLCC 등을 포함한 수동부품, PCB, 접속부품은 전자부품 산업에 있어 뿌리 산업으로의 지위를 지닌다. 해당 산업에서 중소기업의 매출 비중은 평균 50%를 넘는데 반해 생산액은 국내 전자부품 산업의 생산액 중 총 10%를 채 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뿌리 산업이라는 거창한 명칭이 무색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해당 산업들은 현재 일본 강소기업들이 압도적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

 

현 상황을 조금 과하게 표현 하자면 반도체, 디스플레이, 통신기기 산업을 중심으로 한 국내 대기업의 성장은 국내 중소기업이 아닌 일본의 중소기업이 만드는 기반 부품에 의존하는 구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국내의 전자부품 뿌리 산업은 영세한 중소기업들에 의해 근근이 유지되고 있었다.

 

ㅇ 이런 산업 구조를 모르고 있었던가?

최근 들어 정치권이 “극일”을 외치고 있지만 산업계에서는 이를 마냥 달갑게만 바라볼 수 없다. 지난 수십 년간, 대기업 그리고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고성장 산업 위주의 육성 정책 속에서 상대적으로 소재 부품 산업과 중소기업 육성은 늘 우선 순위에서 배제돼 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각에서는 이제 와서 극일을 외치는 상황 자체가, 국내 전자부품의 근본 육성의 중요성을 백안시 해온 국내 산업 정책의 업보 아니냐는 지적마저 나오고 있다.

 

실제로 지난 19년간 한국 정부는 늘 소재 부품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발표해 왔다. 그러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지원 정책의 프로그램과 대상이 조금씩 수정됐을 뿐, 실질적 성과를 달성하지는 못했다는 평가다. 첨단 핵심소재를 육성하겠다는 정부의 지원 정책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묶여 지자체 권역별로 흩어졌고, 유사한 산업단지가 곳곳에 들어서며 집중력을 잃었다. 지방에 위치한 한 자동차 전장부품 기업 관계자는 관련해서 “오죽하면 정부의 지원 정책이 발표되면, 사업 자체에 전념해서 기업을 키우기보다는, 산업단지가 조성될 때 부동산 가격 상승을 노리는 것이 훨씬 더 빠르고 효과적이다.”라고 말했다.

 

ㅇ 국내 전자부품 산업의 진정한 극일 방향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던 그 현실을 냉정하게 마주해야 할 시점이 왔다. 현 시점에서 국내 전자부품 산업의 장기적 성장 방향은 크게 2가지 영역으로 나뉜다. 우선, ▲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주력 산업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연계 강화, 그리고 진정 ▲ 극일이 필요한 기반 부품영역에서의 중소기업 경쟁력 육성이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통신기기 영역에서는 중소기업들과 국내 유수 대기업들 간 협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소재, 부품 산업 육성 전략에는 반도체 등 대형 산업 영역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안정적 수급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상생 정책이 상당 부분 포함됐는데, 이 부분은 고무적이다. 더불어 최근 발표된 시스템 반도체 2030의 비전에서도 대형 생산설비보다는 중소기업의 강점이 부각될 수 있는 연구개발 중심의 팹리스 육성 정책이 다수 발표돼, 이 부분 역시 중소기업의 주력 산업에 대한 기여도를 높일 수 있는 기회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런 지원 정책을 통해 국내 주력산업을 특정 소수 대기업에 의존하는 구조에서 강력한 시너지를 발현하는 산업 생태계의 형태로 전환 시키는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

 

오랜 기간 구호로만 머물러 있던 소재, 부품 산업의 역량 강화도 이제는 실질적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최근 촉발된 한일 갈등 여파로, 소재, 부품산업의 ‘국산화’가 갑자기 핵심 키워드로 대두되고 있는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제한된 국내 산업 규모를 고려할 때, ‘국산화’만으로는 장기적 관점에서 중소기업들의 경영 안정성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도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금번을 계기로 중소기업들의 성장 목표를 비단 국산화가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 확보로 설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특히, 반도체 대비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초연결사회로의 진입과 함께 급성장하고 있는 센서와 전자제품의 안정적 성능을 담보할 수 있는 MLCC(적층세라믹콘덴서)를 포함한 수동부품에 대한 집중 육성이 필요하다. 더불어 소중한 재원을 마치 공중 살포식으로 분산 투입하기 보다는 재팬 스트라이크 존 대비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잇는 영역에 집중 투사돼야 한다.

테크월드 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전자부품의 제호 변화. 최대한 일본스럽게 보여야했던 그 시절이 있었다. 표지 광고도 일본 기업인 산요(Sanyo)다.

본 특집의 첫 서두에서 회고한 바와 같이, 테크월드 뉴스가 발행하는 산업 월간지 ‘전자부품’의 제호는 오랜 시간 일본풍을 띠어야만 했다. 기고문의 절반 이상이 일본 연구소와 기업에서 넘어 왔다. 그래야만 읽혔고 팔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한국 전자부품 산업은 그리고 우리는 일본의 등을 바라보면서 달려왔다. 그러던 전자부품은 2009년을 기점으로 지난 20년간 써 오던 한자 제호를 영문으로 바꿨다. 기고문의 출처도 국내 혹은 미국과 유럽이 중심이 됐다. 자연스럽게 왜색은 옅어졌다. 바꿔 말하면 옅어진 왜색만큼이나, 국내 전자부품 산업은 발전해 있었다.

정치권은 오늘날 또 다시 극일을 외친다. 극일이 가능할 것이냐는 정치권의 소란스러운 논쟁은 전자부품 업계에 사실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국내 전자부품 산업 그리고 그 산업 종사자인 우리 모두에게 극일은 이미 지난 수십년 간 현재진행형이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테크월드가 발행하는 월간 <EPNC(전자부품)>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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