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월드뉴스=서유덕 기자] 과학 기술의 역사에서, 인류는 신석기 혁명(농경, 목축)을 계기로 정착 생활을 시작했고, 1차 산업혁명(경공업)으로 공장제 기계공업 중심의 경제사회를 맞이했다. 2차 산업혁명(중화학 공업)은 철도·통신·전기·자동차 등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산업 사회를 불렀으며, 1970년대 3차 산업혁명(정보통신기술)으로 서비스 산업이 등장했다.

혁명이라고 부르는 급격한 문명 발달(또는 변화)에는 그 변화를 좌우하는 요소가 있다. 예를 들어,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문명 발달의 필수요소로 꼽은 ‘총, 균, 쇠’ 같은 것이다. 혁명에는 그 필수요소를 둔 경쟁이 수반됐고, 인류는 생존에 직결되는 재화를 얻거나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중세 이전까지는 농경지(땅)가, 근현대부터는 공장을 가동할 자원(면화·광물·연료)이 그 대상이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총·균·쇠… 다음은 칩

다음 문명 발달의 필수 요소는 무엇이며, 어떤 모습으로 경쟁하게 될까? 4차 산업혁명은 이미 진행 중이고, 그 핵심 재화는 두말할 것 없이 ‘반도체 칩’이다. 반도체 없이는 5G·인공지능(AI) 등 새 산업 새 기술을 다룰 수 없다. 우위를 내려놓고 싶지 않은 기술 선진국들은 반도체 선도를 목표로 앞다퉈 전략과 방침을 내놓고 있으며, 미래 먹거리를 확보하려는 후발 주자들 역시 대책을 마련 중이다. 10000년 전의 토지, 1000년 전의 면화, 100년 전의 석유에 버금가는 오늘날의 반도체 시장은 기업 간 경쟁의 수준을 넘어 핵심 재화를 확보하고자 하는 국가 간 경쟁의 장이 됐다.

각국은 ‘자립’을 목표로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정책 기조에는 코로나19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는데, 코로나19 이전 IT 제품 수요가 부진했던 탓에 반도체 공급을 줄였으나 팬데믹으로 비대면 경제·사회활동이 확산되며 폭증한 디지털, IT 수요가 시장의 파이를 배로 키웠기 때문이다. 공급이 부족해지자 반도체 제조 기업을 보유한 나라들은 자국에 반도체를 우선 공급하거나 수요처를 전략적으로 선택했다. 이로 인해 산업의 한 분야이던 ‘반도체’가 외교와 안보의 영역으로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반도체 산업의 유기적인 구조도 ‘자립’의 중요성을 각인시켰다. 특히 현대 반도체 산업의 트렌드는 팹리스(설계)와 파운드리(제조)로 나뉘는 역할 분담 방식이다. 반도체가 점차 미세·복잡화되면서 한 가지 역할에 충실한, 역량을 집중한 기업의 성과가 두드려졌기 때문이다. 팹리스와 파운드리를 중심으로 한 가치사슬(value chain) 간 유기적 협업에 기반하는 현대 반도체 산업은 기업 간, 기업과 고객 간에 강한 상호작용으로 움직인다. 이런 구조에서, 설계든 제조든 해외에 의존하기만 하는 건 위험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각국이 ‘자립’에 사활을 걸고 있는 지금은 더 그렇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미국, 반도체 ‘제조’ 동맹 결성

일찌감치 반도체를 ‘전략물자’로 규정하며 국가 주도의 전략적 접근에 나선 미국은 제조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둔 반도체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의 반도체 제조 경쟁력 강화 정책은 자국 기업의 반도체 수급난을 해소하고 아시아 의존을 극복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특히 무역전쟁에서 시작된 중국과의 갈등이 반도체, 통신, 소프트웨어 등 첨단 기술의 패권 경쟁으로 번지면서,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영토 내에서 생산되는 반도체 물량을 늘리고 대중국 의존도를 낮출 방침이다.

미국은 인텔 등 자국 반도체 기업의 설비 투자를 지원하는 것은 물론 우리나라와 대만의 파운드리도 미국 내로 유치하며 ‘반도체 제조 동맹’ 구축에 나섰다. 2월 백악관의 반도체 공급망 점검 지시 후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 진출을 선언(‘IDM2.0 전략’)했으며, 4월 백악관 반도체 회의에 참석한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 투자를 연이어 발표했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5월 한미정상회담에 CEO들이 동행, 미국 내 생산 시설 투자 관련 협상에 나서기도 했다.

행정부의 정책에 발맞춰, 미 의회는 반도체 제조시설 투자와 R&D를 지원하는 반도체 제조 인센티브 법안(CHIPS for America Act, 2020)과 파운드리 법안(American Foundries Act, 2020)을 통과시켰으며, 올 1월에는 반도체 수요 충족을 위한 미국 내 제조 및 연구에 대한 투자 인센티브 법안을 추가 제정했다.

미국 기업의 투자도 공격적이다. 인텔은 3월 파운드리 사업 진출과 함께 미국 애리조나주 팹 신축, ARM·RISC-V 아키텍처 추가 지원, 7나노(㎚) 공정 개발 등의 내용을 담은 IDM2.0 전략을 발표했다. 팹 신설에 200억 달러를 투입하고 뒤쳐진 공정 기술을 회복함으로써 TSMC, 삼성전자, UMC, SMIC 등 아시아 파운드리를 따라잡겠다는 계획이다 그리고 7월 15일(현지시간)에는 ‘인텔이 3000억 달러를 투자해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의 7%가량을 점유한 글로벌파운드리를 인수할 계획’이라는 월스트리트저널(WSJ)발 보도가 나왔고, 26일(현지시간)에는 퀄컴과 아마존웹서비스를 파운드리 고객사로 유치했다고 인텔이 직접 발표함으로써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지형 변화가 본격 예고됐다.

※ 관련 기사: [기획] 파운드리 2강 추격하는 인텔

반도체 산업의 병목점: 글로벌 반도체 대기업은 일부 국가에 집중돼 있다 (출처: 블룸버그)
반도체 산업의 병목점: 글로벌 반도체 대기업은 일부 국가에 집중돼 있다 (출처: 블룸버그)

 

중국, 자립 위한 ‘기술력’ 제고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2014년 ‘국가 집적회로 산업 발전 촉진 강요’를 통해 설계, 웨이퍼, 패키징, 테스트 등 제조 전반과 설비, 재료에 이르는 반도체 산업 전반의 경쟁력 강화를 주문하며 시작됐다. 그리고 2015년 ‘중국 제조 2025’를 통해 자급률 70%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수립했으며, 중국 정부는 이를 위해 1조 위안(170조 원) 규모의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하겠다고 밝혔다. 그 후속 조치로 10년 이상 반도체를 생산한 기업의 소득세를 면제(1~2년), 인하(3~5년)하는 세제 혜택을 발표했으며, 2019년에는 세제 혜택 대상을 설계·소프트웨어 기업으로까지 넓혔다.

중국 반도체 굴기는 코로나19 이후 급증하는 반도체 수요와 미국의 제재로 인한 공급난에서 기인한다. 2020년부터 본격 도입한 5세대 이동통신(5G)의 확산과 코로나19 영향이 겹치며 IT 수요가 대폭 늘었으며, 반도체 수요 또한 공급량을 넘어섰다. 작년 10월 이미 5G 기지국 70만 곳을 개국했고, 올해 5G 스마트폰 이용자 수는 2020년의 2배 이상인 약 4억 명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내수 증가에도 불구하고, 중국 IT 기업은 미국과의 갈등으로 야기된 반도체 수급난 심화 때문에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미세 공정이 적용된 반도체 칩은 기본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생산 차질로 인한 손실이 컸다. 시장조사기관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Strategy Analytics)에 따르면, 미국의 주요 제재 대상 중 하나인 화웨이의 2020년 스마트폰 판매량은 1억 8820만 대로 2019년(2억 4050만 대)보다 대폭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7월 11일에는 칭화대학이 설립한 반도체 기업 칭화유니가 베이징 법원에 파산 구조조정 신청을 했는데, 대중 반도체 부품·장비 수출을 억누르고 있는 미국의 제재가 파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분석된다.

중국의 정책은 기술력 향상과 생산 라인 확보에 집중돼 있다. 중국 국내의 반도체 기술 수준이 전 세계 기술력에 비해 낙후돼 있기에, 중국 정부는 정책·자금·인재 등 전 분야에 걸친 지원으로 빠른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특히 기술 인력 육성 정책에 집중하고 있는데, 3월 중국 국무원 학위원회는 반도체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집적회로학과를 신설하겠다는 방침을 내놓기도 했다. 외부 인력 유치에도 적극적인데, SMIC가 대만 출신 CEO에게 연봉 450% 인상 등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 그 예다.

 

대만, ‘장비·소재’ 국산화

TSMC를 앞세워 파운드리 우위를 점유하고 있는 대만은 제조분야 기술 우위를 유지하면서도 소재·장비 국산화 정책을 내놓으며 반도체 공급망 전 과정에서의 자립을 도모하고 있다.

대만 경제부는 ‘반도체 첨단공정센터’로의 부상을 목표로 2030년 반도체 생산액 5조 대만달러 도달, 소재·장비 국산화라는 세부 과제를 수립했다. 이를 위해 반도체 소재·장비 외국 기업 투자 유치와 교류·협력 주선, 해외 인재 유치, R&D 인센티브 지원, 소재·소자 인증 플랫폼 구축 등을 수행 중이다. 반도체 장비 개발 비용도 지원하고 있다.

한편 반도체 제조 기술 우위 유지를 위해, 대만 과학기술부는 'AI 반도체 제조공정 및 칩 시스템 R&D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는 AI 관련 반도체 제조공정, 칩 시스템 연구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센서 ▲차세대 메모리 ▲인지컴퓨팅과 AI ▲사물인터넷 ▲자율주행차 ▲반도체 제조공정 등 6대 유망기술을 집중 개발해 반도체 분야에서 글로벌 경쟁 우위를 제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일본, 공급망 안전성 확보

일본은 반도체 공급난과 미중 무역갈등을 계기로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한국과 중국에 밀려 침체를 겪은 반도체 제조 산업을 회복하고 경쟁력을 갖춘 소재·부품·장비를 앞세워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일본 경제산업성은 ▲생산기반 강화 ▲수요 산업과의 연계 ▲전력반도체 신소재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 초 지진과 화재로 인해 겪은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 나카 공장 생산 중단 사고를 교훈 삼아 공급망의 중장기적 안전성을 확보하는 데 정책의 방향이 집중됐다.

우선 일본 내 생산기반 강화를 목표로 TSMC 등 해외 파운드리 및 산업기술종합연구소(NEDO)와의 장비·소재 공동개발을 추진한다. 특히 그래핀 등 신소재 적용 3D 패키지 개발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AI 반도체 기술 개발을 수요 기업과 연계해서 추진하면서도, NAND·CMOS·차량용MCU·전력반도체 등 일본이 강점을 보유한 제품의 포트폴리오도 강화할 방침이다. 특히 전력반도체에 신소재인 실리콘카바이드(SiC), 질화갈륨(GaN), 갈륨옥사이드(Ga2O3) 적용을 늘려갈 계획이다.

 

유럽연합, 제조 강국 독일 중심으로 반도체 육성

유럽 주요 국가들 역시 반도체 산업의 대외 의존을 낮추고자 유럽연합(EU), 특히 제조업이 발달한 독일을 중심으로 지원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이미 2018년, 독일·프랑스·이탈리아·영국이 총 17억 5천만 유로의 예산을 출자해 29개 기업·연구기관에 40개의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제1차 마이크로전자 및 반도체 분야 ‘유럽 공통이해관계 중요 프로젝트(IPCEI)’가 진행 중이다. 2020년 12월에는 오스트리아도 합류했다. 이 1차 IPCEI에서는 ▲고효율반도체 ▲전력반도체 ▲스마트센서 ▲고성능 광학장비 ▲복합재료 등 5가지 부문의 기술 연구개발을 지원한다.

1차 IPCEI를 통해 유럽 5개 국의 29개 기업이 42개 프로젝트를 지원받고 있다 (출처: IPCEI-Me)
1차 IPCEI를 통해 유럽 5개 국의 29개 기업이 42개 프로젝트를 지원받고 있다 (출처: IPCEI-Me)

대미 대아시아 반도체 의존을 탈피하기 위한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페터 알트마이어(Peter Altmaier) 독일연방경제에너지부(BMWi) 장관은 2월 열린 ‘Europe 2021 컨퍼런스’에서 “유럽의 반도체 산업이 미국과 동아시아 의존을 줄일 수 있도록, 제2차 IPCEI에서는 반도체 특허, 설계, 개발, 생산에 대한 EU 차원의 지원이 있을 것”이라며 “지원 규모는 기업투자의 20∼40%”라고 언급했다. 이어 “유럽 전체 반도체 산업에서 약 500억 유로 규모의 투자가 유발되기를 기대한다”며 “독일은 2차 IPCEI 프로젝트에 10억 유로를 투입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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