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가 의장인 곳서 무슨 말 하겠나”

[테크월드뉴스=이혜진 기자] 자산 2조원 이상의 코스피 기업들은 2019년부터 ‘기업지배구조 보고서’ 공시 의무 대상이다. 해당 보고서는 상장사가 ‘지배구조 모범 규준’의 10개 항목을 준수했는지 자평하는 문서다. 이 중 ’핵심 지표’는 한국거래소가 관련 항목 15개를 규정, 이에 대한 ‘OX’를 해당 보고서에 표시하도록 한 것이다. 정보 기술(IT), 오토모티브 분야 기업의 지배구조 핵심 지표를 점검해본다. [편집자 주]

2020년 현대자동차 기업지배구조보고서의 '핵심지표 준수 현황'. 현대차뿐만 아니라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현대글로비스∙현대로템∙현대위아∙현대건설∙현대제철∙이노션 등도 회사 대표가 의장을 겸하고 있다.
2020년 현대자동차 기업지배구조보고서의 '핵심지표 준수 현황'. 현대차뿐만 아니라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현대글로비스∙현대로템∙현대위아∙현대건설∙현대제철∙이노션 등도 회사 대표가 의장을 겸하고 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오너 일가의 ‘책임 경영’일까. 총수의 독단 경영을 위한 ‘이사회 장악’일까.

범(汎)현대가(家)인 현대차그룹∙HDC그룹∙KCC그룹과 두산그룹의 총수 일가가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를 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두고 오너 일가의 책임 경영이라는 평가와 함께 이사회의 독립성·투명성을 떨어뜨린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사회는 대표의 연봉과 주요 투자사항을 결정하는 최고 의사결정 기구이기에 이런 인식은 자연스럽다. 

5대 재벌 중 현대차만 ‘오너=이사회 의장’

24일 각 사의 2020년 기업지배구조보고서에 따르면, 현대차는 정몽구 전 회장이 21년 간 맡았던 이사회 의장을 아들인 정의선 회장이 물려받아 겸하고 있다. 정 회장은 현대차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 위원과 기아와 현대모비스의 사내이사도 맡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이 ‘5대 재벌’로 불리는 기업 중 현대차에만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최근 정 회장의 움직임을 보면 현대차 이사회를 장악하려는 분위기가 강해 보이는데, 이는 LG 등 나머지 그룹의 주력 계열사들이 대부분 대표이사와 의장을 분리한 것과 반대되는 행보”라며 “특히 삼성의 경우 과거 국정농단 사태 때를 돌이켜보면 이재용 부회장이 당시 이사회를 장악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 사실이지만, 최근 이 부회장의 삼성전자에 대한 지분율은 1.4%밖에 불과한데다 과거 ‘4세 승계는 없다’고 공식 선언한 적도 있어 몇 가지 측면에서 현대차와 대조된다”고 말했다.   

현대차 회장이었던 정몽규 HDC 회장은 2018년 현대산업개발이 지주사(HDC)와 사업회사(HDC현대산업개발)로 쪼개짐에 따라 HDC의 의장으로 취임, 현재까지 재직 중이다. 그 전까진 공시상 확인할 수 있는 2002년부터 HDC현산의 의장직을 수행한 것으로 파악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룹을 이끌고 있는 정몽진 KCC 회장도 이사회의 의장을 겸하고 있다.

2020년 현대제철 기업지배구조보고서의 '핵심지표 준수 현황'. 현대제철은 지난해 7개의 지표를 미준수했다. 
2020년 현대제철 기업지배구조보고서의 '핵심지표 준수 현황'. 현대제철은 지난해 7개의 지표를 미준수했다. 

“박용만 회장 의장 관둔다 해서 책임 경영 포기한 건가”

두산은 박정원 그룹 회장과 동생인 박지원 두산중공업 회장이 대표와 의장을 겸직 중이다.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은 사업 부문이 현대중공업그룹으로 매각됨에 따라 이달 말 의장 직을 내놓는다. 앞서 2016년 3월 의장에 선임된 지 5년 3개월 만의 퇴진이다. 지난달 말까지 그의 임기 만료 예정일은 내년 정기 주주총회 개최일이었다. 

이 같은 총수 일가의 겸직에 재계에선 “책임 경영으로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경영진을 감시·견제해야 하는 이사회의 독립성·투명성이 떨어지고 오너 일가의 독단 경영이 강화된다며 반대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오너가 자신을 견제하라고 만든 이사회를 장악하는 게 책임 경영이면, 의장을 관두는 박용만 회장은 책임 경영을 포기한 셈”이라며 “총수가 의장인 곳에서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의장을 전문 경영인이 맡는다고 해서 오너 경영과 ‘거리두기’가 가능한 것도 아니다. 전문 경영인의 상당수는 오너(대주주) 측근이 맡기 일쑤기 때문이다. 이에 대주주의 의사가 이사회에서 그대로 관철되는 구조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현대중공업 오너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복심’ 권오갑 현대중공업지주·한국조선해양 회장이다. 그는 현재 양사의 이사회 의장을 겸하고 있다.

2020년 (주)두산 기업지배구조보고서의 '핵심지표 준수 현황'. 두산은 지난해 8개의 지표를 미준수했다. 
2020년 (주)두산 기업지배구조보고서의 '핵심지표 준수 현황'. 두산은 지난해 8개의 지표를 미준수했다. 

의장 겸해야 세습, 상속 시 더 유리

일각에선 이 같은 현상의 원인이 기업 지배구조에 관한 인식과 재벌 문화에 있다고 본다. 

전문가는 “한국 사람들의 대부분은 ‘오너가 소유한 기업이니 오너 마음대로 경영하겠다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생각해 이사회의 독립성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며 “또 한국 특유의 재벌이라는 문화에선 오너가 자녀에게 자리를 세습하거나 재산을 물려주려는 욕심을 강하게 드러내는데, 이 때 회사에 대한 오너의 지분율이 아무리 높아도 오너가 이사회의 의장을 겸하지 않으면 외부에서 기업을 볼 때 ‘이 사람은 기업에 대한 지배력이 약하니 소유권도 약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기업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이 약해져 세습이나 상속에 서 더 불리해지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CJ그룹과 롯데그룹, 한화그룹은 기업지배구조보고서 의무 작성 대상에 해당하는 전 계열사가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 분리’를 미준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GS그룹(GS∙GS건설)의 일부 계열사에서도 해당 지표를 준수하지 않았다. 

이들 기업을 포함해 기업지배구조보고서 작성 대상 기업 215개사 중 해당 지표를 준수한 기업은 30.3%에 그쳤다. 전년(28.1%) 대비 2.2%포인트만 증가한 수치다.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 분리(30.3%, 3개년 수치 모두 유사)' 준수율은 지난해 215개 기업의 기업지배구조 지표 중 평균치 이하를 기록했다.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 분리(30.3%, 3개년 수치 모두 유사)' 준수율은 지난해 215개 기업의 기업지배구조 지표 중 평균치 이하를 기록했다.

“채택률 낮으니 의무 보고에서 빼야” vs “보고해야 그나마 개선” 

이에 대해 전국경제인연합회 측은 “채택률이 계속 낮은 지표인 만큼 미채택사유 등을 감안해 (의무 보고 사항에 넣는 것에 대해) 재검토가 필요하다”며 “단계적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공시가 예정된 상황에 기업지배구조보고서까지 각각 작성해야 하면 (업무의) 효율성이 반감되고, 보고서 간 체계성이 깨지는 문제 등이 우려(행정부담도 가중)되는 만큼 ESG 공시 로드맵에 맞춰 (기업지배구조보고서의 의무 보고 사항을) 간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전문가들은 의무 보고라도 해야 기업 지배구조가 개선된다는 설명이다.

전문가는 “정부에서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하니 전년 대비 올해는 어땠는지 비교가 돼서 그나마 일부 기업들이 노력한 것”이라며 “(의무 보고에서 제외된) 금융 기업들의 경우 ‘대표가 이사회를 3번 연속 장악하지 못하면 바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다 보니, 최근엔 4번 연속 선임되는 것이 기본이 됐다”고 지적했다.   

투자자를 위해 대표와 이사회 의장이 분리돼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전문가는 “투자자가 더 많이 유입되고, 회사의 기업 지배구조가 더 투명해지며 내가 출자한 만큼 회사로부터 수익을 얻는 구조가 현실화되려면 대표이사와 의장이 분리돼야 한다”며 “그게 바로 주식회사의 기본 원리”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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