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급 부족과 미국 정부의 지원, 재도약 도움닫기

[테크월드뉴스=서유덕 기자] 지난 1월, 당시 인텔의 차기 CEO 내정자 ‘팻 겔싱어’는 2020년 4분기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특정 칩 생산은 파운드리 업체에 외주 생산을 맡길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자체 생산 계획과는 별도로 외부 파운드리를 활용할 계획이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 분명했다. 겔싱어는 “CEO 취임 후에 외부 파운드리 활용과 관련한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라 전하며 파운드리 2강(TSMC, 삼성전자)의 기대를 높였다.

그러나 두 달 뒤, 인텔은 2018년 정리했던 파운드리 사업에 다시 진출한다고 밝혔다. 지난 3월 24일 새벽 열린 온라인 행사 ‘인텔 언리쉬: 미래를 설계하다’에서, 겔싱어 CEO는 ‘7㎚ 공정 개발’과 함께 ‘인텔 파운드리 서비스’를 발표했다. 미국 애리조나에 20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단행, 두 개의 새로운 팹을 건설하겠다는 계획도 포함됐다.

인텔의 파운드리 사업 진출 전망이 밝은 건 아니다. 2012년에는 22㎚ 기반의 팹리스 주문제작 사업체인 ‘인텔 커스텀 파운드리 그룹’을 설립하고 파운드리 사업에 진출했으나, AMD·애플·퀄컴·엔비디아 등 대형 팹리스의 사업 수주에 실패하는 등 더딘 성장을 보인 끝에 사업을 정리했던 경험이 있다.

‘TSMC와 삼성전자보다 공정 수준이 낮고 수주 경쟁에서 밀려 성공할 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2020년 12월, 미국의 행동주의 헤지펀드인 ‘서드포인트’의 대니얼 로브 CEO가 ‘인텔은 제조업 리더십을 상실해 TSMC와 삼성전자로부터 밀려났으니 반도체 생산 부문을 정리해야 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인텔 이사회에 보낸 바 있다. 매튜 브라이슨 웨드부시증권 애널리스트는 “인텔의 기존 시장 지위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을 할 수 있는, 어쩌면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존재한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난과 미 정부의 지원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의 영향으로 글로벌 IT·자동차 제조사는 감산을 계획했으나, 비대면 경제의 확산과 경기 회복 기대감에 IT 제품 수요가 당초 예상과 다르게 증가했다. 이에 반도체 등 전자부품 생산량은 급증한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특히 차량용 반도체 공급량은 글로벌 완성차 제조사의 생산을 장기간 중단시킬 만큼 심각한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이다. 시장조사업체 IHS마킷은 “2021년 1분기 전 세계적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으로 인해 경형 상용차 생산이 130만 대 규모의 차질을 빚고 있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한편 미국은 중국과의 무역 갈등과 아시아 중심의 반도체 제조산업 구도를 우려하면서 자국 반도체 기업 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2020년, 상무부는 미국의 제조장비·설계·소프트웨어 기술을 사용한 모든 반도체를 화웨이와 그 계열사에 공급할 경우 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하는 내용의 제제안을 발표했다. 이 정책 기조는 정권이 바뀐 바이든 행정부에 와서도 유지됐다. 2월 24일 조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 등 4개 품목의 공급망 검토를 명령했는데, 이 행정명령에는 반도체 공급망 실태 조사와 정책 과제 발굴이 규정돼 있다. 앞으로 미국은 TSMC의 대만과 삼성전자의 한국 등 아시아 국가 의존도를 낮추고 자체 생산력을 늘릴 방침이다.

2020~2024년 전 세계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 규모 (단위: 십억 달러, 출처: 트렌드포스)
2020~2024년 전 세계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 규모 (단위: 십억 달러, 출처: 트렌드포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상황만을 고려해도, 인텔의 파운드리 사업 진출 선언은 나름 적절한 결정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21년 파운드리 산업 시장 규모는 2020년(681억 달러)보다 8.4% 증가한 738억 달러로 추산되며, 2022년 805억 달러, 2023년 873억 달러, 2024년 944억 달러를 기록하는 등 증가세가 지속될 전망이다. 겔싱어 CEO는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2025년 파운드리 시장 규모는 10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비록 TSMC와 삼성전자가 높은 수준의 공정 기술을 보유해 파운드리 시장 대부분을 점유했다고 하더라도, 두 업체를 포함한 기존 파운드리 기업들의 생산력만으로는 수요를 전부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여기에 미 정부의 반도체 산업 지원으로 시설 투자 비용 일부를 절감할 수 있고, 국내 생산을 내세우는 미 정부의 정책 기조에 탑승해 미국 팹리스 기업의 파운드리 수요를 확보할 가능성도 있다.

겔싱어 CEO는 12일 열린 백악관 초청 ‘반도체 공급난 관련 화상회의’에 참여해 “파운드리 서비스를 통해 차량용 반도체 생산을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아시아에 편중된 파운드리 서비스의 대안을 제공하기 위해 연내 미국과 유럽 등에 추가로 공장 확장 계획을 발표할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팻 겔싱어 인텔 CEO
팻 겔싱어 인텔 CEO

 

기술 부진과 자구책 강구의 결과

인텔은 1971년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인 ‘인텔 4004’를 만들었고, 1979년 인텔 8008을 출시해 IBM PC에 공급했다. 이들 프로세서에 쓰인 CISC 기반의 x86는 데스크톱 PC 시장의 표준과 같은 명령어 아키텍처가 됐다. 높은 기술력에 자체 생산력까지 보유한 인텔은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프로세서 시장을 주도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시장을 선도하던 인텔의 기술력이 하락했다. 2013년 취임한 브라이언 크르자니크 CEO는 취임 기간 동안 수익성이 낮은 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했는데, 당장의 성과가 없다는 이유로 R&D 부서를 다수 해체하는 지나친 과감함을 선보였다. 결국 인텔 기술력의 핵심인 반도체 제조공정 개발 부서까지 사라지면서, TSMC와 삼성전자가 앞다퉈 5㎚는 물론 3㎚ 공정 개발과 양산을 발표하고 있을 때도, 인텔은 14㎚ 수준에 머물러야 했다. 컴퓨팅 환경이 PC에서 모바일로 변화하는 와중에도 CPU만을 고집한 인텔은 결국 CPU 시장을 ‘AMD 라이젠’에, 모바일 AP 시장을 ‘퀄컴 스냅드래곤’에 내주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최고기술책임자(CTO) 출신의 팻 겔싱어가 CEO에 취임했다. 인텔 이사회는 겔싱어에게 기술력 회복과 재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 겔싱어가 발표한 7㎚ 공정 개발, X86 CPU IP 공개, 파운드리 서비스 재진출은 이례적인 만큼 재도약을 위한 획기적 결정인 것이다. 적어도 2010년대보다 기술과 사업 투자, 기회 모색에 적극적인 건 분명하다.

성과를 내기 힘들다는 건 인텔도 알고 있을 것이다. 새 팹 준비는 물론 미세 공정 개발과 양산에 최소 4~5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생산에 돌입해도 3~5㎚ 공정 수준의 TSMC와 삼성전자를 상대로 고성능 칩 생산을 수주하는 건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코너에 몰린 인텔로서는 시장 상황과 국내·외 정세를 손 놓고 바라보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텔 오코틸로 팹 전경
인텔 오코틸로 팹 전경

 

파운드리 성공은 인텔 스스로에게 달린 문제

인텔 파운드리 서비스 출범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를 낸 월가와 업계의 근거는 대부분 ‘인텔 자체의 문제’다. 파운드리 사업과 관련된 공정 문제만 봐도, TSMC와 삼성전자에게 뒤쳐진 원인은 R&D를 홀대한 인텔의 탓이다. 물론 과거 파운드리 사업 실패 경험도 부정적 평가에 영향을 준다.

미세 공정 개발에 성공해 3강으로 도약하든, 2강의 틈새에서 비교적 낮은 공정 단계의 범용 칩 파운드리 시장을 공략하든, 파운드리 사업에 다시 뛰어든 인텔에게는 해결해야 할 두 가지 분명한 과제가 있다. 우선 과거보다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2018년 사업을 정리한 인텔 커스텀 파운드리 그룹의 실패 원인으로 ‘폐쇄성’이 꼽힌다. 인텔의 주력 사업 모델은 직접 개발한 아키텍처와 CPU를 직접 생산해 AMD 등 다른 제품과 초격차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업 방식 때문인지, 인텔은 IP 포트폴리오 확보와 개방에 소극적이었다. 파운드리는 팹리스(또는 IDM)의 외주를 수주받는 ‘서비스업’이다. TSMC가 성공한 밑바탕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신뢰 서비스 철학이 있었다.

또한, 낮은 공정 단계의 범용 칩 수주를 주력 사업 모델로 구상한다고 해도, 미세 공정 개발에 성공해야 한다. 앞으로 공정은 더 미세화되고 팹리스 고객의 외주 의뢰 제품도 점점 더 낮은 공정 수준을 요구할 것이다. 이미 2020년 8월 TSMC는 2㎚ 공정 개발과 생산 계획을 밝혔다. 현재 10㎚ 수준에 그치는 인텔의 7㎚ 공정 개발은 파운드리는 물론 차기 CPU 출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정부의 지원과 낙관적인 시장 상황만 보고 뛰어들기에는, 지금의 파운드리 업계은 다시 후발주자로서 시작하는 인텔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물론 인텔의 앞날이 어둡기만 한 건 아니다. 인텔은 14㎚ 제품으로도 타사의 7㎚ 제품과 비슷한 성능을 내는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또한 x86 아키텍처를 공개하고, 인텔 파운드리에서 ARM과 RISC-V 아키텍처의 라이선스 사용도 가능할 것이라 밝혔다.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인텔 오리곤 팹 내부
인텔 오리곤 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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