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년 한국·대만·일본·중국이 반도체 산업 62% 장악

[테크월드뉴스=서유덕 기자] 1950년대 초 미국 동부에서 출발한 반도체 산업은 점차 서쪽으로 옮겨가 캘리포니아 주에 실리콘밸리를 형성했다. 기술 경쟁력을 앞세워 지금까지 세계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거대 반도체 설계 기업(팹리스)과 종합반도체회사(IDM)가 이때 출범했다. 퀄컴과 브로드컴, 엔비디아, AMD, 자일링스, 인텔처럼 이름 높은 반도체 기업들도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두고 있다.

여기에 세계 경제가 글로벌화하면서 국경 없는 생산시스템, 즉 글로벌 가치사슬(GVC)이 만들어졌다. 미국·유럽은 설계, 아시아는 제조로 양분된 반도체 산업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아시아 반도체 4강(한국, 대만, 일본, 중국)은 제조(파운드리)와 패키징·테스트 외주(OSAT), 소재 등 생산 부문 역량 강화에 주력해왔다. 그런데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세계를 강타하며 반도체 부족 현상이 초래했다. 상대적으로 설계보다 제조가 중요해진 것이다. 생산 시설이 집중된 아시아가 실리콘밸리를 제치고 새로운 반도체 강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만 남부 실리콘밸리 스카이라인.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미국 샌프란시스코 만 남부 실리콘밸리 스카이라인.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코로나19 이후 아시아 영향력 급상승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IT기기 수요가 급증했다. 예상치 못한 수요로 완성품 전반에 반도체가 부족해졌다. 이에 반도체 공급망 무게 중심이 설계에서 생산으로 옮겨 갔다. 특히 시스템 반도체 공급난이 심화되면서 미국 팹리스 대기업들은 대부분 아시아에 위치한 파운드리 라인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가 유행한 뒤부터 세계 반도체 산업에서 아시아가 전략적으로 더 중요해졌다. 특히 세계 파운드리 시장을 70% 이상 차지하는 TSMC와 삼성전자의 가치가 대폭 올랐다.

아시아가 세계 반도체 산업에 미치는 영향력은 앞으로 더 증가할 전망이다. 시장조사업체 한국딜로이트는 11월 25일 발간한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중심으로 비상하는 아시아·태평양’ 보고서에서 2030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아시아·태평양이 차지하는 비중이 62%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시아가 당분간 반도체 제조, OSAT, 소재 부문을 주도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파운드리는 한국과 대만이 장기간 세계 시장을 지배할 것으로 보인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TrendForce)가 12월 2일 발표한 2021년 3분기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 조사 결과에 따르면 상위 10개 파운드리 업체 중 아시아 국적이 아닌 기업은 글로벌파운드리 1곳뿐이다[표 1]. TSMC와 삼성전자는 현재 5나노미터(㎚)급 선단 공정을 주도하고 있고, 앞으로 몇 년 내에 3㎚ 공정을 상용화할 계획이다.

차량용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구형 공정 라인도 아시아에 몰려 있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에 따르면 2030년 세계 전체 웨이퍼 생산능력 중 83%가 아시아에 집중될 것으로 전망된다.

[표 1] 2021년 3분기 파운드리 매출액 상위 10개 기업 (단위: 백만 달러 / 출처: 트렌드포스)​​​​​​​
[표 1] 2021년 3분기 파운드리 매출액 상위 10개 기업 (단위: 백만 달러 / 출처: 트렌드포스)

OSAT 시장은 대만과 중국의 점유율이 높다. 2020년 매출액 기준 세계 OSAT 시장의 40%를 점유한 대만은 지속적인 연구·개발(R&D)로 와이어본딩 공정 수준을 첨단화하고 있다. 같은 기간 30%를 차지한 중국 OSAT 산업은 아직 전통적인 수준의 공정에 집중돼 있으나 M&A를 통해 기술력을 키워가고 있다.

재료는 여전히 일본이 절대적 우위에 서 있다. 특히 노광 공정에 사용되는 포토레지스트를 독점하다시피 한다. 반도체 재료는 순도와 구성을 맞추기 까다로운 만큼 장기간 축적된 기술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본의 소재 부문 우위는 오래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그림 1].

[그림 1] 2020년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반도체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 (출처: SIA, 딜로이트)​​​​​​​
[그림 1] 2020년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반도체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 (출처: SIA, 딜로이트)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대한 반도체 투자도 활성화되고 있다. 특히 시장 점유율과 비례해서 R&D 투자가 이뤄질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선단 공정 개발을 위해 2020년 한 해 동안 R&D 지출을 19% 늘렸다. 대만 반도체 제조사들도 R&D 지출을 24% 확대했다. 일본 반도체 장비 기업 도쿄일렉트론(TEL)도 극자외선(EUV) 장비 R&D에만 1350억 엔(1.4조 원) 규모를 투자할 계획이다.

설비 투자도 대폭 증가할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시스템 반도체 경쟁력을 높이고자 2030년까지 171조 원 규모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TSMC는 일본에 8000억 엔(약 8.4조 원)을 투자해 신규 팹을 착공하겠다고 밝혔다.

최근 글로벌 반도체 장비·재료 기업들이 국내 투자 계획을 연이어 발표하기도 했다. EUV 노광 장비를 독점 공급하는 ASML(네덜란드)은 화성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을 발표했다. 식각·증착 장비 부문 1위 기업 램리서치(미국)는 용인 R&D 센터를 착공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외국 기업들의 국내 투자는) 우리 반도체 산업의 성장 잠재력이 높음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런 투자가 점차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1980년대와 달리 미국도 꼼짝 못하는 아시아 반도체 파워

아시아 반도체 산업 위상이 종주국인 미국에 견줄 만큼 상승하는 일은 과거에도 있었다. 1980년대 글로벌 매출 상위 10개 반도체 기업 중 6개를 보유했던 일본은 실리콘밸리 신화를 일군 미국을 위협하는 반도체 강국이었다.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미 군정으로부터 기술·자금 지원을 받은 일본은 반도체를 중심으로 전자 산업을 발전시켜 나갔다. 소니와 도시바, 히타치, 샤프 등 일본 기업은 카메라와 라디오, 오디오, TV 시장을 장악해 나가며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일본 중심의 아시아 반도체 파워는 오래 가지 못했다. 미국은 대일 무역 적자가 심화되고 일본의 경제력이 강해지자 특허법과 무역법을 내세워 일본을 압박했다. 실리콘밸리 기업들도 정부의 보조금 지원을 등에 업은 일본 기업을 상대로 불공정 문제를 제기했다. 미국은 일본 기업의 반도체 가격 경쟁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주요 5개국 재무장관 회담을 열어 환율조작까지 종용했다.

이 같은 전방위 압박에 일본이 힘을 잃는 사이, 한국과 대만은 각각 D램과 OSAT로 반도체 기반을 갖춰 나갔다. 한국 정부와 기업은 반도체 산업에 전폭적인 지원과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메모리 시장을 지배하고 글로벌 제조 역량을 갖추는 데 성공했다. 대만은 독자적인 R&D로 제조는 물론 설계까지 아우르는 가치 사슬을 구축했다. 이에 한국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만에서 TSMC와 미디어텍 같은 글로벌 반도체 대기업이 등장했다.

삼성전자 클린룸 내부. (출처: 삼성전자 뉴스룸)
삼성전자 클린룸 내부. (출처: 삼성전자 뉴스룸)

코로나19로 세계 반도체 산업 지형이 크게 바뀌었다. 미국은 반도체 패권을 다시 잃지 않기 위해 두 번째 견제에 돌입했다. 글로벌 반도체 수요·공급 기업을 세 번이나 불러 미국 내 투자와 공급망 관련 정보(재고, 가격, 주문량 등)를 요구하고, 대 중국 무역 규제를 단행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1980년대와 다르다. 대미 무역과 기술 전수에 의존했던 일본과 달리 지금의 아시아 반도체 파워는 미국과 중국을 두 축으로 한 글로벌 가치사슬에 연결돼 있다. 미국이 아시아 반도체 생태계 핵심 4개국을 동시 제재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설사 1980년대 일본에게 했던 것처럼 아시아 반도체 산업을 억압한다고 해도 반도체 칩 공급난에 허덕이는 미국 국적 IT 서비스·완제품 기업들도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최소 수년 이상 소요되는 대규모 제조 시설을 미국 기업의 힘만으로 구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도 미국 경제를 지탱하는 구글과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제너럴 모터스, 포드, 테슬라 같은 기업들이 반도체 조달에 명운을 걸고 있다.

미국은 한국과 대만, 일본을 포함하는 반도체 동맹을 구축하고 중국을 견제하는 외교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반도체 제조에 강한 한국과 대만 기업의 생산 시설을 미국으로 유치해 미국 내 반도체 공급망을 안정화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 반도체 업계를 언제까지 포용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1980년대 일본 반도체 산업을 제재하기에 앞서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전후 일본에 반도체 기술을 전수하고 경제적 지원을 아까지 않았다. 미 의회 상원에서 6월 통과된 반도체생산 촉진법은 지원 대상에 해외 기업을 포함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아직도 하원에 계류 중이다. 자국 중심주의가 만연한 반도체 무대에서 우리도 언제든 1980년대 일본처럼 견제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글로벌 공급망 문제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한다. 아시아 반도체 파워가 낭만적인 접근으로는 지속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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