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급 병목 원인 파악 위해 재고·판매 정보 필요”
기업, “경쟁사에 흘릴 수 없는 기밀 요구해 난감, 순순히 응해선 안돼”
정부, “기업의 자율에 맡길 것이나 한·미 간 파트너십도 고려해 대응”

[테크월드뉴스=서유덕 기자] 반도체를 포함한 공급난·물류난과 원자재 가격 상승 등의 악재로 2021년 하반기 이후 경제 전망은 밝지 않다. 이달 초 전 세계 주식 시장은 곤두박질쳤으며, 글로벌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물가가 상승함에도 경제는 위축되는 현상)이 우려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여기에, 9월 23일 세 번째 반도체 회의에서 미국이 국내외 주요 반도체 기업들에게 기밀 급 정보를 요구한 것은 업계에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국내는 물론 해외 대기업에게도 재고, 판매가격 등 영업 비밀을 당당하게 요구한 것은 전 세계 경제와 기술을 주도하는 미국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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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美 사실상 정보 제출 의무화

4월과 5월에 진행된 두 차례의 반도체 회의에서 미국은 기업 관계자들에게 국내 투자를 요구했다. 2월 반도체를 전략물자로 규정하고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에게 내준 패권을 되찾겠다는 바이든 행정부의 조치에 수반된 첫 행동이었다. 이에 많은 관련 업체들이 미국 정부의 요구에 응했다. 미국 기업인 인텔은 물론이고, TSMC와 삼성전자 등 전 세계 파운드리 생산량을 다수 점유한 아시아 업체도 곧장 미국 내 신규 시설 투자를 발표했다. 인텔은 3월 발표한 IDM 2.0 전략에 따라 9월 말 애리조나 주 챈들러 캠퍼스에 2024년부터 2㎚ 공정 적용 파운드리 서비스에 주력할 신규 팹 2개를 착공했다. TSMC도 애리조나 주의 피닉스 지역에 2024년부터 5㎚ 공정 서비스를 가동할 팹 신설 투자를 단행, 6월 착공을 공식화했다. 삼성전자도 곧 애리조나를 포함한 2~3개 후보지 중 한 곳을 선택해 생산 라인 구축을 시작할 계획이다. 이 같은 미국의 행보에 대해 중국 관영매체 환구시보의 영자지인 글로벌타임즈는 “미국이 중국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반도체 회의를 열었다”, “백악관은 반도체를 중국의 기술력 상승을 억제하는 무기로 사용하려 한다”고 논하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처럼, 올해 초부터 이어진 미국의 반도체 행보는 중국 견제와 미국 생산·공급 자립이 목적인 듯 보였는데, 세 번째 회의에서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의 병목 현상을 개선하겠다는 이유로 글로벌 대기업이 자국 정부에도 공개하지 않는 기업 비밀을 당당히 요구했고, 지나 레이몬도(Gina Raimondo) 미국 상무부 장관이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말한 “만약 기업들이 우리의 요청에 자발적으로 응하지 않는다면 데이터를 제공하도록 요구하는 수단을 꺼낼 것”이란 메시지는 갱스터(gangster)의 협박으로 받아들이기 충분한 언사였다.

회의 다음날인 9월 24일, 미국 상무부는 연방관보와 연방규정전자포털을 통해 전일 진행된 화상회의에 참석한 기업뿐만 아니라 글로벌 반도체 수요·공급 기업 전부를 대상으로 [표 1]과 같은 세부 정보 제출을 요구했다. 여기에는 자사의 재고·판매 관리는 물론 자칫 실수로라도 유출될 경우 계약상의 책임을 지게 되는 고객사의 매출과 경영 전략 정보까지 포함하고 있다.

[표 1] 미국 상무부가 9월 24일 연방관보에 게재한 반도체 공급망 설문 내용(번역)
[표 1] 미국 상무부가 9월 24일 연방관보에 게재한 반도체 공급망 설문 내용(번역)

미국이 요구한 반도체 정보의 자발적 제출 기한은 11월 8일이다. 레이몬도 장관의 말마따나, 미국은 반도체 공급 병목을 해소하기 위해 업체 간 투명성을 확보하겠다는 명분으로 국방물자생산법(DPA)을 앞세워 기업에게 정보 제출을 강제할 것으로 보인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대만, “미국에 공장 지어주는데 정보까지 내라고? No!”

전 세계 반도체 업체들의 반응은 당황 그 자체다. 업계뿐만 아니라, 반도체가 나라 살림을 뒷받침하는 우리나라와 대만 등은 미국의 예상 외 요구에 대응책을 고심하고 있다.

대만 정부와 기업은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노력의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고객사와의 비밀을 포함한 민감 정보를 함부로 제출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목소리를 냈다. 9월 23일 회의가 끝난 직후만 해도 “반도체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례 없는 조치를 취할 것”, “반도체 공급망 안정을 주도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적극적인 협력을 강조했던 TSMC는 미국 정부의 기업 정보 공개 요구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 실비아 팡(Sylvia Fang) TSMC 법률 고문은 10월 7일 논평을 통해 “우리는 회사의 민감 정보, 특히 고객과 관련된 정보를 절대 누설하지 않을 것”이라며 “미국이 요구한 설문지의 내용을 평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미국의 정보 요구가) 공급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돕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것”이라며 “우리는 차량용 반도체의 생산량을 늘리는 등 공급난 완화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고 언급했다. TSMC 고문의 발언은 반도체 공급난 해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자사의 노력을 강조하면서도 미국의 요구가 지나치다는 메시지로 해석된다. 한편, 류치퉁(Liu Chi-Tung) UMC CFO(최고재무책임자)도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고객사의 비밀 정보를 보호할 것”이라고 전했으며, 대만 정부 또한 같은 이유를 들어 미국 측의 요구에 반대 입장을 전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중국 “반도체 정보 요구는 중국 견제의 일환”

한편, 중국에서는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관련 정보 제출 요구가 중국의 반도체 산업을 옥죄기 위한 준비 작업의 일환이라는 견해가 제기된다. 홍콩 일간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중국 상하이의 컨실팅 회사인 인트랄링크(Intralink)의 전자제품 및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부문 책임자 스튜어트 랜들(Stewart Randall)이 한 발언을 인용해 미국 정부가 요청한 특정 정보들은 중국 업체들을 견제하는 데 쓰일 수 있다고 보도했다. 랜들은 “일례로 최근 3년간 자재, 장비 구매량과 조달처 등 소재·부품·장비 수급 관련 정보를 확보하면 어떤 업체가 중국 기업과 거래를 중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며 “이런 정보들은 미국이 지출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자국의 자원을 적절히 할당해야 할 곳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 반도체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 속에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 기업들은 결국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컨설팅 기업 커니코리아(Kearney Korea)의 김상규 파트너는 9월 30일 진행한 ‘반도체 산업의 구조와 본질’ 세미나에서 “미중 무역 갈등 이후 전 세계 주요 반도체 업체들은 중국 내 공동 개발과 투자를 보류하는 기조로 선회하고 있다”며, “결국은 필요한 요소기술과 활용처, 강력한 규제책과 동맹 세력을 보유한 미국의 패권 확보가 유력해 보인다”고 언급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8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1차 대외경제안보 전략회의’를 주재,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8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1차 대외경제안보 전략회의’를 주재,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우리 기업·정부 대응은 언제 어떻게…

우리 업계와 정부는 대응 방향을 고심 중이다. 5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국정감사에 참석한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미국의 요구는 이례적인 조치라고 생각한다”고 언급하면서 “필요한 경우 미국 정부와 협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다음날인 6일에는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OECD 각료이사회에서 캐서린 타이(Katherine Tai)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만나 “미국 정부가 요구한 반도체 정보의 범위가 방대하고 영업비밀도 다수 포함돼 국내의 우려가 큰 상황”이라는 우리 측 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정보 제출 마감 기한이 다가오면서, 정부는 18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주재로 제1차 대외경제안보 전략회의를 소집해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국내 기술 육성 및 보호 전략 ▲CPTPP 가입 문제와 함께 ▲미국 정부의 요청 관련 대응 방향을 논의했다. 정부는 ①기업의 자율성 존중 ②정부 지원 ③한미 간 파트너십·협력의 세 가지 관점에 바탕을 두고 대응하겠다며, 기업과의 소통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이 자리에서 구체적인 대책과 방법이 언급되진 않았다.

반도체 공급망 문제가 기업을 넘어 국가 단위의 외교적 문제로 확대된 상황에서,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의 요구 관련 정부의 목소리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미국의 정보 제출 요청을 포함한 글로벌 반도체 공급난 문제는 기업이 개별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며 “정부 방침에 보조하며 방향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정보 제출 마감 기한을 3주 남겨 놓은 시점에서도 정부 차원의 뚜렷한 공식 입장이나 발표는 없는 상황이어서 기업의 시름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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