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패망이 소부장 산업 부흥으로
반도체 분야는 절대적 우위… 日정부 반도체 허브 구상
국내 반도체 소부장, 단기간 국산화 성과

일본 반도체 소부장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사진=빙이미지크리에이터]
일본 반도체 소부장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사진=빙이미지크리에이터]

[테크월드뉴스=김승훈 기자] '잃어버린 30년'과 함께 과거의 영광이 바래고 있지만 일본의 입지는 여전히 강력하다. 일본은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의 경제규모를 유지하고 있는데다가 소위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중소기업들이 버팀목이 돼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중소기업들 가운데 이름은 생경하지만 애플, 삼성전자, TSMC 등 초일류 기업들을 단골 고객으로 거느리며 ‘슈퍼 을’의 면모를 보이는 곳들이 적지 않다. 이들의 제품을 다른 곳에서 쉽게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 지배하는 일본 소부장 기업… 전쟁 패망이 소부장 산업 부흥으로

글로벌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일본의 소부장 기업의 수는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타이요 공업은 경기장이나 공항 등에 쓰이는 돔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와테크는 1980년대 부터 초소형 CCTV 카메라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세이렌은 무인화 가상주문으로 1600개 이상의 원단을 생산하고 있으며, 고마츠스프링은 소형 정밀스프링의 강자로 꼽힌다.

일본 소부장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른 곳에서 쉽게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독보적인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독 일본에 기술 경쟁력을 가진 중소기업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역사적 배경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패배’가 꼽힌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군수업체에 인력과 자원이 집중됐으나 패망한 이후 군수업체들이 폐업하면서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창업을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다. 소니, 무라타 제작소 같은 유명한 대기업들 뿐 아니라 현재 기술력으로 평가 받는 많은 소부장 중소기업들도 이때 생겨났다.

자동차 배기가스 측정장비의 호리바제작소(1953년), 전자현미경의 일본전자(1949년), 오토바이헬멧의 아라이헬멧(1950년), 야광도료의 네모토특수화학(1948년) 등이 대표적이다.

전쟁 중에 전차, 군함, 전투기 등 무기를 생산하며 제조업 기반은 이미 충분히 확보되어 있었다. 여기에 이들 중소기업들이 타 경쟁기업과 차별화하려고 끊임없이 혁신한 결과 오늘날 해당 분야의 세계적 강자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일본의 장인정신도 소부장 기술력의 바탕이 됐다. 소재와 부품의 경우 연구개발에 장시간이 소요되고, 숙련도가 품질을 좌우하는 만큼 한 우물을 깊게 파는 일본인 특유의 성향이 한 차원 높은 기술력 확보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이처럼 패망 후 암울하던 시기에 중소기업들의 성공신화는 일본 국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덕분에 중소기업에 대한 이미지도 좋아졌다. 소위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을 살려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 보니 일본에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가 크지 않다. 한국 중소기업의 평균 임금은 대기업 대비 60% 수준인데 반해, 일본은 꾸준히 8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 중소기업들은 대기업 이상 고연봉을 보장하는 곳들도 적지 않다.

일본 정부도 이러한 중소기업을 위한 정책적 지원에 적극적이다.

지난 1999년에는 ‘모노즈쿠리 기반 기술진흥 기본법’을 공표하기도 했다. 모노즈쿠리는 ‘최고의 제품을 위해 혼신을 다한다’는 의미로 우리 말로 장인정신이라 할 수 있다.

아지노모토 ABF [사진=아지노모토]
아지노모토 ABF [사진=아지노모토]

 

반도체 분야는 절대적 우위… 日정부, ‘슈퍼 을’ 앞세워 자국 내 반도체 허브 구상

미래 산업의 핵심인 반도체 분야에서도 일본 소부장 기업들이 절대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 안보신기술센터(CSET)에 따르면 일본이 반도체 소재 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은 56%로 세계 1위다.

반도체 노광장비에 쓰는 포토레지스트가 대표적인데 전 세계 포토레지스트 시장의 90% 이상을 JSR, 도쿄오카공업, 스미모토화학 등 일본 기업이 장악하고 있다.

반도체 성형 및 접착에 쓰이는 폴리이미드는 전체의 90%, 불순물을 씻어내는 고순도불화수소도 70%를 차지하며 거의 독점하고 있다. 일본 신에쓰와 섬코는 핵심 소재인 실리콘 웨이퍼 글로벌 1, 2위 기업이다.

반도체 부품 쪽에는 아지노모토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인공조미료(MSG)를 만든 식품회사인데 조미료를 만들던 화학 기술을 이용해 반도체에 들어가는 마이크로 절연 필름 ‘아지노모토 빌드업 필름(ABF)’을 개발했다. PC의 중앙처리장치(CPU)나 그래픽 칩의 회로를 만드는 핵심 부품으로 인텔과 AMD의 CPU, 엔비디아의  GPU, 퀄컴의 AP등에 아지노모토에서 독점 공급하는 ABF가 들어간다.

반도체 장비 쪽도 일본 기업을 빼놓을 수 없다. 글로벌 4대 장비 회사로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스·램리서치, 네덜란드 ASML과 일본 도쿄일렉트론이 꼽히며, 캐논과 니콘도 핵심 공정인 노광장비 분야에서 ASML과 경쟁하고 있다. 극자외선 노광장비(EUV)로 업계의 주도권이 넘어가기 전까진 반도체 노광장비는 ASML과 캐논, 니콘의 3자 경쟁구도였다. 

이처럼 일본 소부장 기업들의 독점적 지위를 바탕으로 일본 정부는 자국 내에 반도체 산업 허브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본 정부는 최근 10년 이상 자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한다는 조건으로 기업 설비투자의 최대 3분의1을 지원하고, 반도체 장비와 소재는 ‘최대 50%’를 보조한다는 파격적 혜택을 내걸었다.

TSMC나 삼성전자 등 글로벌 1, 2위 반도체 기업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현지에 반도체 공장을 만들면 일본 소부장 기업들과 보다 원활한 협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파운드리 1위 기업 TSMC은 현재 12~28나노 파운드리 생산시설인 1공장을 구마모토현에 건설 중이다. TSMC는 6나노 2공장에 이어 3나노 3공장까지 일본 현지에 짓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삼성전자도 일본 요코하마시에 400억엔(약 3600억원) 규모의 첨단 반도체 연구 개발 거점을 신설할 계획이다.

또, 미국 마이크론은 히로시마현에 2024년 말 양산을 목표로 10나노 D램 공장을 건설 중이다.

반도체 웨이퍼 증착장비 가이던스 [사진=주성엔지니어링]
반도체 웨이퍼 증착장비 가이던스 [사진=주성엔지니어링]

 

국내 반도체 소부장, 단기간 국산화 성과… 정부 R&D 예산 삭감에 발목 잡혀

지난 2019년 일본과 무역전쟁 이후 국내 소부장 중소기업들은 단기간에 경쟁력을 갖추는데 성공했다. 4년 동안 정부가 5조원을 투입해 국내 소부장 기업을 지원하면서 적어도 국내 시장에서는 일본과도 경쟁이 가능하다는 게 반도체 소재 기업 관계자의 설명이다.

특히, 반도체기판 분야에서 제품 국산화 및 시장 확대 성과가 이미 나타나고 있다. 반도체기판은 패키징 공정의 핵심 요소 중 하나다. 칩과 메인보드를 연결해 전기적 신호 및 전력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간 일본 기업이 관련 소재·장비를 주도해왔으나 최근 프로텍, 와이엠티 등 국내 기업들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반도체 패키징 장비업체 프로텍은 마이크로 솔더볼을 접착하는 데 쓰이는 어태치 장비를 국내 최초로 개발해냈다. 45마이크로미터(um) 수준의 마이크로 솔더볼을 다루는 어태치 장비는 기술적 난이도가 높아 일본 기업 2~3개사에서 전량 수입해왔었다. 프로텍은 일본 주요 경쟁사 제품 대비 높은 생산성을 앞세워 해당 장비를 주요 반도체 및 PCB(인쇄회로기판) 고객사에 공급했다. 이후 지난 2022년 하반기부터는 오히려 일본에 역수출하고 있다.

와이엠티는 반도체 기판의 원재료인 극동박을 국내 최초로 국산화했다. 극동박은 0.1~0.3um의 매우 얇은 두께로도 안정적인 전기적 특성을 갖춰야 하는 기술적 어려움이 있어 일본 미쓰이화학이 관련 시장을 사실상 100% 독점해왔다. 하지만, 와이엠티가 기판 내 미세회로 구현에 더 유리한 극동박을 개발해 국내 반도체 소재업체에 공급하고 있다.

반도체 혹한기였던 지난 2022년 반도체 관련 소부장 기업 다수가 영업이익이 쪼그라들었지만 주요 기업들이 공격적으로 R&D 비용을 늘리며 경쟁력 강화에 힘쓴 것은 긍정적인 대목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를 생산하는 동진쎄미켐은 지난해 1~3분기 R&D에 392억4800만원을 투입했다. 지난해 동기(361억5400만원)보다 약 10% 증가한 수준이다.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 비율도 3.34%에서 3.97%로 증가했다.

반도체 웨이퍼 증착장비 전문 기업 주성엔지니어링도 같은 기간 R&D 비중을 5% 늘렸다.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 비율은 15.55%에서 29.17%로 약 2배 증가했다.

반도체·디스플레이용 화학소재 기업 한솔케미칼과 반도체 핵심부품인 실리콘 웨이퍼 제조 전문 SK실트론도 동 기간 R&D 비용을 약 10% 더 투입했다.

하지만 올해 중소벤처기업부의 소부장 R&D 관련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서 정부가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올해 정부 예산안에 따르면, 지난해 2183억원이었던 소부장 특별회계 예산은 올해 336억원으로 84.6%나 줄었다. 소부장 특별회계는 반도체와 소부장 기술 자립을 위해 만들어진 예산으로 소부장 분야 연구개발에 주로 투입된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R&D 예산이 감소하면 그동안 연구개발을 지속해 왔던 소부장 기업들의 투자가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이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주력 산업 분야의 소부장 국산화를 지연시킬 수도 있다”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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