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 영향 없으나 글로벌 공급망 개편은 선택 아닌 필수

[테크월드뉴스=신동윤 기자] 초연결 사회에서는 국지적인 사건이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종종 발생하곤 한다. 이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무력 충돌 또한 마찬가지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지적인 전쟁, 그것도 유럽에서 두번째로 가난하고, 농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1차산업 국가인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세계에서 원유와 천연가스 같은 화석연료 가격은 물론이고 각 나라 주식 시장의 폭락을 불러오고 있다. 심지어 향후 곡물 가격과 반도체 분야에까지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런 세계적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우선 출렁이는 원유와 천연가스 가격으로 인해 운송, 유통은 물론 전력 생산 등 에너지 분야에서도 큰 여파가 미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리고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높은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국내 반도체 제조 분야 또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직접적인 교역량은 크지 않아

우리나라와 우크라이나 간의 교역규모는 수출 5억 8100만 달러(약 7140억 원), 수입 3억 900만 달러(약 3800억 원)로 교역대상국 64위다. 수출 비중 0.1%, 수입 비중 0.05%에 불과하다. 하지만 네온과 크립톤, 크세논 같은 특정 품목에 대한 수입의존도는 각각 23%, 30.7%, 17.8%로 매우 높은 수준이다.

러시아는 이보다 비중이 조금 높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의 전체 교역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수출 1.5%, 수입 2.8%다. 원유는 러시아산 비율이 5.6% 수준으로 충분히 다른 수입선으로 돌릴 수 있는 양이다. 하지만 문제는 러시아가 사우디아라비아, 미국과 함께 3대 산유국 중 하나이며, 러시아산 원유에 크게 의존해 온 유럽과 중국, 일본, 인도 등이 다른 원유 수입선을 찾게 되면서 원유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는 점이다. 또 원유뿐 아니라 천연가스, 곡물 등 다른 원자재도 같은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침공했을 때, 국제 네온가스 가격은 600% 이상 급등했었다. 이에 많은 기업들이 공급망 다변화를 추구해왔기에 단기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 문제의 심각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국제 정세 전문가들에 따르면 러시아의 전략은 초기에 우크라이나 동부를 점령하거나 빠르게 괴뢰정권을 수립해 크림반도까지 이어지는 영역을 차지할 계획이었다. 이렇게 됐다면 러시아는 지난번 크림반도 점령때와 마찬가지로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 추진하는 뜨뜻미지근한 제재를 감내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거센 우크라이나의 저항과 함께 그동안의 누적된 러시아 방산 비리, 그리고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한계로 인한 군사들의 사기저하로 고착상태에 빠져 있다. 러시아가 어떤 형태로든 이 전쟁을 빠른 시일 내에 끝내지 않는다면 괴로워지는 것은 단순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두 나라의 국민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할 수도 있다.

특히 제조업 중심이지만 자원 대부분을 교역에 크게 의존하는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더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여파를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세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반도체 수급 불안에 힘들어하고 있는 시점에 또 다른 불안 요소가 등장하는 것은 반도체 시장에 큰 고통을 줄 수 있다.

 

각종 희소 가스와 팔라듐, 니켈 가격에 영향

우크라이나의 남쪽 항구인 오데사에 위치한 크라이언 엔지니어링(Cryoin Engineering, 이하 크라이언)은 주로 네온과 네온 동위원소, 헬륨, 제논, 크립톤과 같은 비활성 희소 가스 전문 제조 기업이다. 이들 제품 중 네온과 크립톤은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노광과 식각 공정에 사용되는 핵심 소재다.

과거 우리나라가 네온 수입의 절반 이상을 우크라이나에서 의존할 때, 대부분의 물량을 공급했던 회사가 바로 이 회사다. 현재는 중국에서 전체 물량의 66% 이상을 수입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우크라이나, 바로 크라이언이 23%에 가까운 물량을 공급하고 있다.

희소 가스의 대부분은 철강 제조의 부산물로 나오는 가스를 활용해 만들어진다.
희소 가스 대부분은 철강 제조에서 부산물로 나오는 가스를 활용해 만든다.

특히 세계 희소 가스 생산량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작지 않다. 네온은 우크라이나가 세계 네온 생산의 70%를 차지하고, 크립톤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세계 생산량의 80% 정도를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크라이언이 생산하는 희소 가스는 러시아 철강회사들의 제철소에서 분리한 가스를 정제해 얻는다. 하지만 기본은 지구에 퍼져 있는 공기에서 얻는 것이다. 산소와 질소가 대부분의 차지하고 있는 공기 중에서 극히 희소량만 포함돼 있는 네온과 크립톤 같은 희소 가스를 업체에서 분리해서 모으고 있다.

반도체 생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비가 레이저인데 여기에 이런 희소가스가 사용된다. 초미세 공정인 EUV 장비에는 고출력이 필요해 이산화탄소(CO2) 레이저를 사용한다. 하지만 아직도 반도체 생산에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10나노미터(nm)대의 DUV 공정에는 네온과 헬륨을 섞은 엑시머 레이저를 사용한다. 이 엑시머 레이저는 반도체 노광 공정 외에도 의료용이나 레이저 프린터 등 다양한 곳에 사용되는 가장 범용적인 레이저 기술이다.

반도체 생산 공정에는 이외에도 메탈 공정에 사용되는 크립톤, 에칭 공정에 사용되는 제논 등 다양한 공정에 여러 종류의 희소 가스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희소 가스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영향을 받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반도체 생산에 필수 소재이자 내연기관 자동차 촉매로도 활용되는 팔라듐은 러시아가 세계 생산량의 43%(91톤)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팔라듐 가격은 3월 16일 기준으로 전쟁 개전 당시에 비해 변동이 거의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전기차 보급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내연기관의 촉매인 팔라듐 수요가 점차 줄어들고 있어서라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지난 5년간 이미 5배나 가격이 올라간 상태여서 더 이상 오를 여지가 크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더 우세하다.

또 러시아가 세계 시장에서 40%를 차지하고 있는 합성 사파이어는 러시아 산업통상부가 글로벌한 러시아 경제 제재에 대한 보복으로 수출 금지를 검토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합성 사파이어는 LED의 핵심 소재다. 다만 합성 사파이어에 대한 수출 제한은 최후의 수단으로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사용하기 힘든 카드이기 때문에 아직 큰 걱정을 할 수준은 아니라는 판단이다.

최근 심각하게 거론되는 소재는 배터리 양극재 주원료인 니켈이다. 러시아가 세계 생산량에서 9.2%를 차지하고 있는 니켈은 지난 3월 기록적인 폭등세를 보였다. 심지어 이틀간 235%의 가격 상승에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서 거래 중단 사태까지 벌어졌다. 다만 이는 전쟁 여파에 편승한 투기 때문으로 전쟁으로 인한 수급 불안은 아니어서 곧 제자리를 찾아갈 것으로 예상된다. 더구나 배터리용으로 분류되는 클래스1 니켈은 전체 니켈 수요의 5% 수준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배터리 제조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 세계적인 공급망 개편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 세계적인 공급망 개편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전쟁 이후 공급망 개편에 대비해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여파는 비교적 제한적이다. 예를 들어 희소 가스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 가스가 없다고 해도 생산성이 떨어질 뿐 반도체 생산이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원유나 천연가스 같은 에너지, 그리고 곡물에서 매우 큰 파급력을 만들어 낼 것이다. 하지만 희소 가스나 광물 등에서는 그리 큰 영향을 주기 힘들다는 것이 업계 평가다. 

오히려 우리나라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한 문제보다는 중국과 일본 등이 자원과 소재를 전략무기화할 경우를 더 조심하고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리나라는 지난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그리고 얼마 전 벌어진 요소수 사태 등을 겪으면서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수입선 다변화, 그리고 핵심 소재에 대한 국내 생산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적어도 반도체 생산과 관련해 이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단기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전쟁이 장기화하거나 단시간 내에 결론이 나더라도 장기 예측이 어려운 변수가 발생할 경우 세계적으로 공급망 재편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이런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어떤 전략을 펼치느냐에 따라 향후 시장에서의 경쟁력 확보에 큰 변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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