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 전쟁, 중동 '석유'에서 중국 '희토류'로…글로벌 공급망 다변화 필수
과거 요소수 사태로 확인된 공급망 위기 호주·말레시아·베트남 등으로 공급망 다변화 추진 속도
[테크월드뉴스=김승훈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후 전 세계를 대상으로 '관세'라는 무기를 휘두르고 있다. 관세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몇몇 나라는 불공정한 무역 협상 체결도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며 무역 전쟁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주목할 것은 트럼프 1기 당시에는 중국이 미국에 맞서다 참패를 당했지만 지금은 외려 트럼프 대통령이 몸을 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희토류'에 있다는 분석이다. 첨단 산업에 반드시 필요한 희토류를 중국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가운데 '수출 통제' 카드를 꺼내자 미국이 화들짝 놀랐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석유를 놓고 글로벌 자원 경쟁이 벌어졌다면 이제는 희토류가 그 지위를 대신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에 세계 각국은 장기적 관점에서 공급망 다변화와 희토류 국산화 투자를 통해 대중 의존도를 낮추는데 주력하고 있다.
첨단산업의 쌀 희토류, 중국이 글로벌 공급망 90% 차지
지난 10월 중국 상무부가 AI 및 군사 목적의 희토류 수출을 통제한다고 밝히자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에 100%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한동안 잠잠하던 미중 무역갈등이 재점화된 것이다. 이후 양국 정상은 최근 한국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고 중국은 희토류 수출 통제를 1년 유예하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회담 후 "희토류 문제가 해결됐다"며 반색했다. 중국이 희토류를 수출하지 않을 경우 미국이 입을 피해가 얼마나 큰지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희토류가 첨단산업의 '쌀' 또는 '비타민'으로 불릴 만큼 중요도가 높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영구자석인 '네오디뮴 자석(Nd-Fe-B 자석)'이다. 네오디뮴 자석은 30% 정도의 네오디뮴을 비롯한 희토류 금속을 섞어서 합금으로 만든 것인데 풍력발전기와 전기자동차용 모터의 핵심 부품이다.
전투기, 잠수함, 항공모함 등 각종 무기와 휴머노이드로봇 등 차세대 기술 개발에도 희토류가 필요하다.
현재 전 세계 희토류 패권은 중국이 가지고 있다. 과거에는 미국도 희토류를 생산했지만 정제 및 제련 과정에서 환경오염 문제가 심해지자 손을 떼기 시작했고 그 사이 중국은 희토류를 ‘전략 자원’으로 삼아 기술을 고도했다.
결국 중국은 전 세계 희토류 공급망의 90%를 차지하게 됐고, 이로인해 트럼프 대통령도 꼼짝 못하게 만든 것이다.
미국-일본-유럽, 희토류 공급망 구축 나서
이처럼 중국이 압도적인 점유율을 바탕으로 희토류를 무기로 삼자 세계 각국은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미국은 그간 자국 내 매장된 희토류 원광을 중국에 수출하고 중국이 정제한 희토류를 수입해 왔는데 이제 국내 생산 체계 구축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미 국방부가 유일한 희토류 광산 운영사인 MP머티리얼스에 4억 달러 지분 투자 및 10년간 kg당 110 달러의 가격을 보장하는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또, 미 에너지부는 희토류를 포함한 핵심 광물 공급망 및 채굴, 가공, 제조 기술을 발전시키고 확장하기 위해 총 10억 달러 규모의 자금지원기회 공지를 발행했다.
일본은 일찌감치 희토류 자립에 주력해 왔다. 지난 2010년 센카쿠열도 분쟁 때 중국의 대일(對日) 희토류 수출 금지에 따라 일부 희토류 품목의 가격이 약 9배 폭등하는 등 공급망 단절 위기를 경험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2010년 10월 '희토류 확보 종합대책'을 수립하고 2011년 12월 '희소금속 등 광물자원 확보 대책'을 마련했다.
이후 2012년 추경 예산에서 희토류 확보 대책으로 1000억엔을 배정하고 이 중 420억엔은 희토류 이용 산업의 고도화에, 300억엔은 해외 광산개발과 개발권 확보에, 120억엔은 대체 재료 기술개발에 배정하는 등 민관이 협력해 희토류를 중심으로 핵심광물 확보에 적극 나섰다.
덕분에 다른 나라에 비해 안정적인 희토류 공급망을 구축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에는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 등 주요 7개국(G7)이 중국에 맞서기 위해 '핵심 광물 생산 동맹'을 출범시켰다.
영국 수출금융청은 캐나다 천연자원부, 수출 기관과 협력해 영국의 미래 공급망 확보는 물론 캐나다 광산 지원에 도움이 되는 재정 지원을 모색하기로 했다.
이탈리아 에너지 기업 에니(ENi)는 캐나다 리튬, 흑연, 희토류 정제와 폐기물 중요 소재 재활용에 필요한 혁신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 투자를 통해 주요 광물 전략적 생산과 공급망에 진출할 계획이다.
요소수 사태 겪은 한국, 아세안으로 눈 돌린다
한국 역시 희토류 대중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지난해 한국의 중국산 희토류 화합물과 금속 수입 비중은 각 61%, 80%로 나타났다.
만일 중국이 우리나라에도 희토류 수출을 통제한다면 반도체·전기차·배터리 등 주력 수출 품목에 직접적인 타격을 피하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4년 전 요소수 사태를 통해 공급망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당시 중국이 요소수 수출을 통제하자 요소 수입량의 97%를 중국에 의존했던 우리나라는 요소·요소수 품귀 현상이 발생했다.
정부도 희토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범정부 희토류 공급망 태스크포스'(TF)를 운용한 데 이어 희토류 수급 지원을 위한 '희토류 수급대응 센터'를 운영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해외자원개발에 대한 투자·융자를 촉진하고, 희토류 저감기술 개발 및 희토 영구자석 재자원화, 공공비축 확대 등도 추진한다.
또한, 폐가전이나 폐전기 제품에서 희토류를 추출하는 '재자원화'도 적극 추진키로 했다. 컴프레서용 모터, 노트북 하드디스크 등에 희토자석이 내장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어 재자원화를 통해 희토류를 확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전문가들은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하면서 정·제련 단계에서는 당분간 중국과의 협력을 지속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지난 9월 보고서에서 "향후 바나듐, 형석, 베릴륨, 알루미늄, 마그네슘 등으로 중국의 수출통제가 확대될 수 있다"면서도 "탈중국보다는 자원 공급국 내에서 중국 기업과 협력하는 전략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호주·말레시아·베트남 등으로 공급망 다변화 추진
호주,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희토류 자원부국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대표적으로 말레이시아 정부는 한국과 희토류 공급망 협력을 강화하기로 결정하고, 첫 번째 파트너로 영구자석 업체인 JS링크를 선택했다. 지난 7월 호주 희토류 기업 '라이너스 레어어스'와 JS링크가 말레이시아 파항주 쿠안탄 지역에 네오디뮴 자석 생산시설을 짓는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연간 생산량 3천t(톤) 규모의 새 자석 공장은 파항주에 있는 라이너스 레어어스의 1.4㎢ 규모 희토류 정제 공장 근처에 들어서게 된다. 이 정제 공장은 동남아의 유일한 희토류 가공시설이지만, 현재는 호주에서 채굴된 희토류 광석만 정제하고 있다.
이번 계약을 통해 JS링크는 영구자석 생산의 핵심 원료인 희토류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게 된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현재까지 북미·호주·아시아 업체들과 개별 접촉해 25곳과 희토류 채굴부터 영구자석 제품화, 사용 후 재활용까지 전 과정을 하나의 순환 고리로 연결하는 협력 체계를 구축했다.
대표적으로 미국 리엘레멘트 테크놀로지스와 전기차 구동모터의 핵심 원료로 쓰이는 희토류·영구자석 통합 생산기지를 미국에 구축하고 있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희토류 중간재 수급과 영구자석 사업 분야를 맡고, 리엘레먼트 테크놀로지스는 분리·정제와 리사이클 기술을 제공한다.
베트남 역시 희토류 부유국이다. 전 세계 희토류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4%에 불과하나 매장량은 6위에 해당하는 3.9%를 점하고 있다.
노바텍은 이르면 내년 목표로 베트남 현지 기업인 깐안산업과의 합작 투자를 통해 네오디뮴 자석 생산 거점을 설립할 계획이다. 깐안산업은 라오까이성 광산에서 생산되는 네오디뮴을 우선 공급해 원재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