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용·재사용으로 다시 태어나는 폐배터리
시장 규모 2030년에 약 20조…국내외 업체 경쟁 가속도

[테크월드뉴스=이재민 기자] 기후 변화가 글로벌 기업들의 경영 전략을 바꾸고 있다. 이제 탄소중립, ESG(환경보호, 사회공헌, 윤리경영) 등은 낯익은 키워드가 됐다. 완성차 업체들은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내연기관차(휘발유차, 경유차 등)와의 이별을 서두르고 있다. 전기차는 대세가 아닌 필수가 됐다. 전기차 보급이 확대되면 배터리 사용량도 늘어날 것이다. 이에 따라 폐배터리(사용 후 배터리) 산업 시장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시장조사업체인 SNE리서치는 2019년 1조 6500억 원 규모였던 전 세계 폐배터리 시장이 2030년에는 약 20조 원을 넘어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금까지 출시된 전기차의 배터리 수명은 최소 5년에서 최대 10년이다. 사용 기간이 늘어날수록 배터리 충전능력은 초기 용량 대비 70% 이하로 감소된다. 이렇게 되면 주행거리 감소, 충·방전 속도 저하 등으로 배터리 교체가 필요하다.

 

재활용과 재사용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29년 국내 기준 전기차 폐배터리는 약 7만 8981개가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 폐배터리 처리 방식은 재활용(Recycling, 리사이클링)과 재사용(Reuse)으로 나뉜다.

재활용은 폐배터리를 분해한 후 리튬, 코발트 등을 추출하는 방식이다. 리튬, 코발트, 망간, 니켈은 배터리의 약 50%를 구성하는 핵심소재다. 그러나 이런 원자재들이 최근 수요 증가로 가격이 폭등했다.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배터리 소재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가격 상승으로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하지만 폐배터리 재활용이 이뤄지면 핵심소재들을 뽑아낼 수 있어 안정적인 소재 확보가 가능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외에도 폐배터리 재활용은 환경 보호 측면에서 이점이 있다. 폐배터리를 매립해 처리하면 배터리 내의 유해물질이 토양과 지하수를 오염시킨다. 소각할 경우에는 독성 가스가 배출된다. 그러나 재활용하면 폐배터리 내의 중금속, 독성 화학물질 등 유해물질을 회수해 환경 오염 문제를 줄일 수 있다.

▲ 폐배터리를 모아 만든 ESS에 전력을 저장해두면 필요시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하다 (출처: HMG 저널)
▲ 폐배터리를 모아 만든 ESS에 전력을 저장해두면 필요시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하다 (출처: HMG 저널)

재사용은 폐배터리의 상태를 평가해 ESS(Energy storage system), UPS(Uninterruptible power system) 등으로 용도를 변경해 활용하는 것이다. ESS는 에너지저장장치로, 저장장치에 전력을 저장해 필요시 전력을 공급한다. UPS는 무정전전원장치로, 정전되면 비상전원을 공급한다. 초기 용량보다 70% 이하로 성능이 저하된 배터리는 급제동, 가속 등의 고출력을 요구하는 전기차에는 부적합하다. 하지만 고출력을 요구하지 않는 용도로 사용하면 짧게는 3년, 길게는 10년 동안 사용할 수 있다.

재사용은 배터리 셀, 모듈, 팩 단위로 분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단점은 하위 단위로 갈수록 분해 비용과 시간이 증가되고, 상위로 갈수록 불량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내외 완성차 업체들은 경제성을 고려해 모듈, 팩 단위의 재사용 검토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폐배터리 시장에서 국내 업체 현황은?

가장 앞서가고 있는 국내 폐배터리 재활용 업체는 완성차 업체가 아닌 성일하이텍이다. 2008년에 폐배터리 재활용 시장에 진출한 성일하이텍은 폐배터리에서 원자재인 유가 금속을 추출하고 있다. 현재 폐배터리 재활용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업체는 성일하이텍, 벨기에 유미코어(Umicore), 중국 거린메이(GEM)와 브룬프(Brunp) 등이다.

성일하이텍은 지난 7월 초 헝가리 제2리사이클링 파크를 완공했다. 이곳은 성일하이텍이 상용화한 폐배터리의 방전과 해체 공정을 추가한 최신 재활용 시설로, 대지 8만 5000㎡ 규모로 조성됐다. 연간 5만 톤, 약 2만 대 분량의 전기차 배터리를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다. 기존 헝가리 제1리사이클링 파크는 배터리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스크랩 등을 재활용하는 연간 1만 톤 규모 시설이다. 제2리사이클링 파크와 합치면 유럽 내 배터리 공장 스크랩은 물론 폐배터리 등 배터리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연간 6만 톤 규모의 폐자원을 재활용할 수 있게 된다. 성일하이텍은 향후 헝가리 제3리사이클링 파크와 함께 독일에도 리사이클링 파크를 신설할 예정이다.

비철금속 제련 업체인 영풍은 지난 3월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성일하이텍과 함께 전기차 폐배터리 재활용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를 시작으로 폐배터리 시장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최근에는 폐배터리에서 주요 금속을 회수하는 기술을 확보했다. 영풍은 “이 기술은 다이렉트 스멜팅(건식용융기술)을 통해 니켈, 코발트, 구리 등은 95% 이상, 더스트 집진설비를 이용해 리튬은 90% 이상 회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허출원까지 완료한 건식용융기술은 기존 하이드로 메탈러지(습식침출기술) 대비 대형·대용량 배터리 처리에 유리하다. 폐배터리를 모듈 단계까지 해체해 직접 용융로에 넣기 때문이다. 반면 습식침출기술은 폐배터리를 셀 단계까지 분해해 스마트폰 등 중소형 배터리 처리에 사용되고 있다. 영풍은 2022년까지 건식용융기술을 기반으로 연간 2000톤 처리 규모(전기차 8000대 분)의 파일럿 공장을 완공하고, 2023년 이후 대형 플랜트를 건설해 연간 5만~10만 대 수준의 전기차 폐배터리 처리 능력을 확보할 계획이다.

코스모화학, 영화테크 등도 폐배터리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코스모화학은 폐배터리에서 니켈, 코발트, 망간 등을 추출하는 기술을 개발해 특허출원까지 마쳤다. 약 300억 원을 투자한 공장은 2022년 9월에 완공될 예정이며, 연간 니켈 4000톤과 코발트 2000톤을 생산하게 된다. 전장부품 생산업체인 영화테크는 2018년부터 충청남도와 폐배터리 재사용을 위한 연구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폐배터리를 재사용해 개발한 ESS의 성능 실증 작업을 시작했다.

폐배터리 시장에서 다소 의외일 수 있는 GS건설은 자회사 에네르마를 통해 시장에 진입했다. 에네르마는 지난 9월 중순 리튬이온배터리 리사이클링 공장을 착공했다. 에네르마는 “2023년까지 1500억 원을 투자해 연간 4500톤 규모의 리튬, 코발트, 니켈, 망간 등을 생산하며 향후 연간 1만 6000톤까지 생산량을 늘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외에도 두산중공업은 최근 폐배터리에서 탄산리튬을 회수하는 기술을 개발해 사업화를 서두르고 있으며, 포스코는 합작법인(포스코HY클린메탈) 설립, GS그룹과의 협력 등 행보를 이어 나가고 있다. 폐배터리 시장이 아직 초기 단계임을 고려하면, 앞으로 더 많은 업체가 뛰어들 가능성이 높다.

 

배터리 3사, 원자재 가격 상승에 큰 부담...재활용이 해결책

국내 배터리 3사 역시 폐배터리 시장 선점을 위해 힘을 쏟고 있다. 가격이 급등한 원자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게 되면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GM과의 합작법인 ‘얼티엄셀즈’를 통해 북미 최대 폐배터리 재활용 업체인 리사이클(Li-Cycle)과 손잡았다. 얼티엄셀즈와 리-사이클은 올 연말부터 새로운 재활용 프로세스를 시작한다.

또한 LG에너지솔루션은 폐배터리를 재사용해 만든 전기차용 충전 ESS 시스템을 오창공장에 설치했다. 이 시스템은 10만㎞ 이상을 달린 전기 택시에서 뗀 배터리로 만든 충전기로, 전기차 충전을 할 때 사용된다. 100㎾ 충전기로 순수 전기차인 GM 볼트(Bolt)를 약 1시간 충전하면 300㎞까지 달릴 수 있다.

SK이노베이션은 기존 배터리 사업을 물적 분할한 배터리 법인 ‘SK온’을 10월 1일 공식 출범시켰다. SK온은 전기차 배터리뿐만 아니라 ESS, 로봇 등 배터리가 적용되는 다양한 시장을 새롭게 확장하고, 전기차 배터리 서비스(Baas) 사업도 추진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폐배터리 사업도 본격화하고 있다. SK온은 10월 8일 한국산업기술시험원(KTL)과 폐배터리 성능 검사 방법 및 체계를 구축하는 협약을 맺었다. 양측은 배터리를 모듈 단위로 평가하는 방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팩 단위 평가 방법을 구축하기 위해 협력할 계획이다. 팩 단위 배터리 평가 방법이 표준화되면 ESS, 소형 전기 이동수단 등 폐배터리 시장 생태계 활성화를 앞당길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SDI는 폐배터리 전문 업체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피엠그로우 지분 투자, 에코프로그룹과 합작법인 설립(에코프로EM)이 이뤄졌으며, 성일하이텍과 협업하고 있다.

 

전기차 가격 내려 판매량↑, 일석이조 전략

전기차 판매량이 늘어나면서 필연적으로 생길 폐배터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완성차 업체들도 속속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약 3년 전부터 폐배터리 재사용 ESS 시장 진출을 준비해왔다. 현대차는 핀란드의 바즈질라와 파트너십 협약을 시작으로 한국수력원자력, 파워로직스, OCI, 한화큐셀 등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2022년 9월부터는 미국 CPS에너지, OCI솔라파워와 함께 미국 텍사스 지역에 자체 개발한 폐배터리 재사용 ESS로 에너지를 공급할 예정이다. 현대차는 “이를 계기로 수소 생산·저장·발전 시스템도 연계해 재생에너지의 변동성 문제를 친환경적으로 해결할 솔루션 사업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현대차 울산공장에 설치된 폐배터리 재사용 ESS
▲ 현대차 울산공장에 설치된 폐배터리 재사용 ESS

폐배터리 재활용으로 전기차 가격을 낮추면 판매량은 더 증가할 것이다. 해외 완성차 업체들도 이에 동감하는 듯 재활용 기술 확보, 재활용 전문 업체와의 협력 등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 테슬라는 ‘2020 테슬라 임팩트 리포트’를 통해 “자체 기술력으로 폐배터리 소재의 92%를 회수할 수 있게 됐다”며 “이미 2020년 기준 니켈 1300톤, 구리 400톤, 코발트 80톤을 재활용했다”고 밝혔다.

포드는 폐배터리 재활용 스타트업인 레드우드 머티리얼즈와 협력한다. 포드 전기차가 폐차되면, 레드우드가 배터리만 수거해 그 안에 있는 리튬, 니켈 등을 회수할 예정이다. 레드우드 머티리얼즈는 테슬라의 공동 창업자였던 JB 스트라우벨이 2017년에 설립했다. 폐배터리 소재의 90% 이상을 회수하는 기술을 확보했으며, 이미 전기차 4만 5000대를 만들 수 있는 금속을 모아두기도 했다.

폭스바겐은 현재 폐배터리 원자재 회수율을 60%에서 95%로 늘리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BMW는 보쉬 등과 공동으로 ESS 생산라인을 구축하고, 자국 내 전력망과 연계하는 시범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전기차는 ‘친환경차’다. 제조부터 폐기까지 자연에 무해해야 한다. 세계 각국은 일찍이 관련 법과 제도를 도입해 폐배터리 재활용 및 재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새로운 배터리법을 추진해 표준을 확고히 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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