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광적인 우생학 추종자라는 오명 남기기도

[테크월드=김경한 기자] 

(자료: Physics Today)

우여곡절 많았던 노벨 물리학상 수상 과정

1956년 윌리엄 쇼클리(William Bradford Shckley)는 점접촉 트랜지스터(Junction Transistor)를 개발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이때 존 바딘(John Bardeen)과 월터 브래튼(Walter Battain)도 공동 수상했는데, 원래는 쇼클리가 이 명단에서 빠질 뻔한 아픈 사연이 있다. 

벨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세 사람은 1948년에 점접촉 트랜지스터(Point-contact Transistor) 개발에 참여했다. 당시 그들은 깨지기 쉬운 유리 진공 튜브 증폭기를 대체할 소자를 개발하는 일에 몰두했다. 이들의 첫 시도는 반도체의 전도성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외부 전기장을 사용하는 쇼클리의 생각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 그룹은 몇 번의 실패 끝에 2년 만에 점접촉 트랜지스터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쇼클리는 이때 독자적인 반도체 물질 연구에 몰두했고, 가끔 바딘과 브래튼의 연구를 지도해줬다고 한다. 

최초의 트랜지스터(점접촉 트랜지스터)(자료: 위키피디아)

문제는 벨연구소가 특허권을 낼 때 발생했다. 벨 연구소의 변호사들은 쇼클리의 전기장 효과가 이미 1930년 줄리어스 릴리엔펠드(Julius Lilienfeld)의 이름으로 특허출원 중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벨연구소는 특허가 거부될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 쇼클리를 배제한 채 바딘과 브래튼의 이름으로만 특허출원했다.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쇼클리는 점접촉 트랜지스터는 그의 현장 아이디어에 기반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도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특허권을 자신의 이름으로만 게재해야 한다고 바딘과 브래튼에게 말하기도 했다. 

1948년 벨연구소(왼쪽부터 존 바딘, 윌리엄 쇼클리, 월터 브래튼)(자료: 위키피디아)

쇼클리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하기 위해 비밀리에 포인트 접점이 아닌 교차점에 기반한 다른 종류의 트랜지스터를 만들기 위해 연구에 매진했다. 전자의 유동과 확산에 대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고체 결정에서 전자 흐름을 결정하는 미분 방정식을 세우고, 몇 주 후 샌드위치 트랜지스터라는 개념을 도입한 접합 트랜지스터(Junction Transistor)를 발명했고 이에 대한 특허권도 얻었다. 결국 쇼클리, 바딘, 브래튼은 1956년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일본 원폭 투하에 영향을 준 쇼클리 보고서

쇼클리는 1910년 미국인이었던 부모에게서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지만, 때부터 부모의 고향인 캘리포니아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광산에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8개 국어를 구사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어머니는 미국 서부에서 성장한 뒤 스탠포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최초의 여성 광산조사관으로 근무했다. 

쇼클리는 1932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과학 학사 학위(Bachelor of Science degree)를, 1936년 MIT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논문 제목은 ‘염화 나트륨 결정에서 전자 파동 함수의 계산(Calculation of Electron Wave Functions in Sodium Chloride Crystals)’이었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뉴저지의 벨연구소에 취직해 클린턴 데이비슨(Clinton Davisson)이 이끄는 연구 그룹에 합류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쇼클리는 벨연구소에서 레이더 연구에 참여하게 된다. 1942년 5월 그는 콜롬비아 대학의 반 잠수함 작전그룹의 연구 책임자가 됐다. 여기에서 기동 기술을 개선한 잠수함 전술에 적용하고, 충전량을 최적화하는 등의 방법을 고안했다. 1944년에는 B-29 폭격기 조종사의 레이더로 폭탄투하 시야를 확보하는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했고, 그해 말 이 결과를 평가하기 위해 3개월간 전 세계 기지를 순회했다. 이는 마블 영화 ‘엔드게임’에서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의 아버지 하워드 스타크가 전장을 누비며 비밀리에 전쟁무기를 개발하던 장면을 연상케 한다. 쇼클리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1946년 10월 17일 로버트 패터슨(Robert Patterson) 장관으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일본 원폭 투하 장면(자료: 위키피디아)

미국의 전쟁을 돕던 과학자였던 쇼클리는 일본 원폭 투하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1945년 7월 미군 전쟁부서는 쇼클리에게 일본 본토 침공으로 인한 사상자 가능성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할 것을 요청했다. 쇼클리는 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만약 이 연구가 일본 본토 침공과 유사한 국가들의 행동을 살펴볼 때, 패전 당시의 일본인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독일인의 해당 숫자를 초과할 것이라 생각한다. 다른 말로 풀이하면, 우리는 적어도 500만 명에서 1000만 명의 일본인을 죽여야 할 것이다. 우리(미군)는 사망자 40만, 내지 80만 명을 포함해 총 170만~4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 보고서를 토대로, 미군은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촉발시킨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의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했다. 

 

편집광적인 우생학 추종자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쇼클리는 벨연구소로 복귀했고, 이때 존바딘, 월터 브래튼과 함께 트랜지스터를 개발했다. 트랜지스터 발명으로 쇼클리는 여론의 큰 관심을 받았다. 그의 연설과 강연은 인기를 끌었으며, 바딘과 브래튼에게 공을 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대중매체는 쇼클리를 추켜세우고 바딘과 브래튼의 공로는 축소했다. 세 사람의 갈등의 골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이런 이유로 바딘은 벨연구소를 사임했고, 브래튼은 쇼클리와 함께 일하기 싫다는 이유로 다른 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쇼클리는 독단적이고 편집광적인 성격으로 인해 승진에 계속적으로 고배를 마셨고, 연구가이자 발명가 이상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연구소 생활에서 한계를 느낀 그는 1955년 벨연구소를 그만두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갔다. 

쇼클리는 1956년 과학자 출신의 성공한 사업가인 벡맨의 후원을 얻어 벡맨 인스트루먼트(Beckman Instruments)에서 쇼클리반도체연구소의 연구소장이 됐다. 그는 연구소를 열면서 벨연구소의 옛 동료들을 초빙하려 했지만, 그의 독단적이고 편집광적인 성격을 잘 알던 동료들은 아무도 그와 함께 하려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는 젊고 유능한 인재를 영입했다. 이 중엔 나중에 인텔을 공동 창업한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도 포함된다. 채용자 중에 트랜지스터에 대해 아는 사람은 노이스밖에 없었지만, 쇼클리는 개인 능력만 된다면 트랜지스터 관련 기술은 자신이 가르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열렬한 우생학 추종자였던 쇼클리는 채용자들에게 IQ 테스트를 실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직접 뽑은 연구원조차 신뢰하지 않았다. 직원들의 월급을 적은 종이를 사내 게시판에 붙여놓거나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거침없이 연구원을 해고하기도 했다. 직원과 대화를 나눌 때는 아내를 불러서 대화내용을 일일이 적게 하기도 했다. 

그의 편집광적인 성격은 그의 비서가 엄지손가락을 다친 일화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쇼클리는 이 사건이 자신을 독살하려는 음모였다고 결론짓고, 직원들에게 거짓말탐지기를 들이댔다. 나중에 밝혀진 사건의 발단은 부러진 압정에 의한 것이었고, 소속 연구원들은 그와 점점 멀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57년 8명의 연구원(8인의 배신자)은 쇼클리반도체연구소를 떠났다. 

그의 우생학 이론은 말년에 극에 달했다. 쇼클리연구소는 1969년에 닫았으며, 쇼클리는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1975년 명예교수로 은퇴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연구소의 실패로 남다른 고민을 안고 살던 쇼클리는 인종이나 인간의 지능과 같은 우생학에 심취했다. 이 연구가 인류의 유전적 미래를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생학에 근거해 인종차별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지능이 낮은 사람들이 생식률이 높은 현상은 유전자 변형 효과를 가지고 오고, 평균 지능의 하락이 문명의 쇠퇴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미국 흑인의 지적, 사회적 결핍의 주요 원인은 유적적이고 인종적인 것이다. 따라서 환경의 실질적인 개선에 의해서도 크게 치유될 수 없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한 논문에서는 “예비 조사에 따르면, 백인의 혈통이 1% 증가하면 흑인의 지능 지수는 평균 1% 상승한다. 백인 유전자가 가장 적은 흑인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지적이지 않은 상태로 살아간다면, 유전적 노예화가 다음 세대의 운명이 될 것이다. 그 결과는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극단적인 인종 차별과 고통이 될 수 있다. 만약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사회는 극도로 무책임해 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고상하게 의도된 복지 프로그램은 유전적으로 불리한 부분을 불균형하게 재생산함으로써 퇴행적인 진화를 촉진할 수 있다”라고 기술했다.

마침내는 IQ가 100 이하인 사람은 자발적 불임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과학저술가인 로저 위더스푼(Roger Witherspoon)은 쇼클리의 이 주장을 나치의 인체실험에 빗댔다. 이에 흥분한 1981년 쇼클리는 애틀란타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3년간의 소송 끝에 승소했다. 하지만 위더스푼이 쇼클리에게 배상한 금액은 고작 1달러였다.

쇼클리의 우생학은 ‘자신의 위대한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한다’는 결론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인류 최고의 유전자를 퍼뜨린다는 명목으로, 정자은행에 자신의 정자를 기증했다. 세 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참여했다고 알려진 이곳을 언론에서는 ‘노벨상 정자은행’으로 불렀지만,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람은 쇼클리가 유일하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쇼클리는 대학 초청강연을 많이 가졌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대학생들은 그를 비난하는 피켓을 들거나 KKK단 복장을 하고 강연장에 들어갔다. 

편집광적 우생학 추정자였던 쇼클리가 1989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는 그의 곁을 지킨 사람이 두 번째 부인 한 사람뿐이었다. 자녀들은 그의 사망 소식을 신문으로만 접했다고 한다. 

성격적인 면에서는 단점이 많았지만, 물리학자로서의 연구성과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쇼클리를 추켜세운다. 1956년 이후 30명 정도의 옛 동료들이 정기 모임을 갖고 있는데, 2002년 그들은 스탠포드에서 다시 만났다. 그들은 쇼클리의 정보 기술 혁명을 촉발시킨 핵심 역할을 수행한 점을 치하하며, “쇼클리는 실리콘을 실리콘밸리로 가져온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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