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인물열전] 시대를 앞선 ‘영감의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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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인물열전] 시대를 앞선 ‘영감의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
  • 이건한 기자
  • 승인 2020.03.20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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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슨의 유일한 라이벌히자, 오버 테크놀로지의 아이콘

[테크월드=이건한 기자] 역사에 이름을 남긴 뛰어난 과학자 중에는 유독 괴짜가 많다. 남다른 그들은 '남과 다른 생각'을 하고, '남이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발견을 해내는 사람들이다. 엉뚱한 것인지 천재적인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지만, 분명한 건 그들의 발명품 중에는 현재 우리 삶을 크게 바꾼 것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늘 알아볼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도 괴짜 겸 천재 개발자로 정점에 섰던 인물이다. 그의 86년 생애는 평생에 걸친 ‘영감’ 속에 있었다.

니콜라 테슬라(1859~1943)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1859~1943)

천재 개구쟁이, 오직 발명만을 사랑하다

테슬라는 1856년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세르비아계 오스트리아인(후일 미국인)이다. 괴짜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그는 정교회 사제인 성직자 아버지의 밑에서 태어났지만 평범이나 얌전과는 거리가 먼 유년기를 보냈다. 끓는 우유에 몸을 담가보거나 치마 위로 떨어지는 등 과격한 장난을 많이 쳐 몇 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겼다고 한다. 또 음식을 먹기 전에는 꼭 음식의 부피를 재고서야 식사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머리 하나는 대단히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5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주어진 문제는 직감만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흔히 그와 비견되는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는 말로 유명하다면, 후술할 그의 발명은 대부분 번뜩이는 영감에서부터 비롯된 것들이다.

젊은 시절의 테슬라

물론, 테슬라도 노력하는 천재 중 하나였다. 그 역시 자신의 영감을 실현하기 위한 연구로 평생을 보냈다. 게다가 뛰어난 외모, 언변, 지식을 갖춘 덕에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음에도 이성교제나 결혼에는 전혀 흥미를 두지 않았다. “나는 결혼한 남성이 만든 훌륭한 발명품들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던 그의 말이 테슬라의 그런 사상을 잘 대변해 준다.

다만 테슬라는 자신의 발명품이 널리 사용되게끔 하는 사업술에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발명 특허를 잘 관리하지 못해 소유권을 도둑맞기 일쑤였으며, 한때는 큰 부를 쌓았으나 발명에 대한 사업성 증명에 큰 관심이 없어 말년에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 쓸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라이벌이었던 에디슨이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발명가였던 것과 비교하면 그는 몽상가이자 철저한 학자형 발명가였다. 혹자는 그를 진정한 매드 사이언티스트(Mad Scientist)의 전형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고전압 테슬라 코일 변압기 앞에 앉아 독서 중인 테슬라
고전압 테슬라 코일 변압기 앞에 앉아 독서 중인 테슬라

테슬라의 대표적인 발명품 – 교류 전기 시스템

어쨌든 그가 남긴 발명품들은 지금도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교류 전기 시스템이다. 그는 일찍이 교류가 에디슨의 직류 전기 시스템보다 훨씬 앞선 방식이란 확신을 갖고 있었다.

직류는 전기의 세기를 강하게 하긴 쉬우나, 전압을 높이긴 어려워 장거리 전송이 어렵다. 이 때문에 전기를 사용하는 지역마다 각각의 발전소를 세워야 해 비용이 많이 들었으며, 안전성마저 낮아 잦은 화재를 일으키곤 했다.

반면 교류는 손쉽게 고전압 환경을 구현할 수 있는 방식이다.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은 수천 볼트에 이르는 고전압 전기를 중앙 발전소에서 생산해 지역 전신주까지 보낸 후, 변압기를 통해 이를 다시 110V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전기를 공급했기 때문에 경제성과 안전성 모두에서 직류를 압도했다.

결국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에디슨이 교류 전기의자로 사형수를 고문하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테슬라의 교류를 폄하하려 했지만 미국의 전기 시스템은 결국 대부분 교류로 대체되고 말았다. 

 

당시 실현되지 못한 테슬라의 놀라운 발명품

테슬라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천재 개발자였고 지치지 않는 영감의 소유자였다. 그는 숱한 ‘오버 테크놀로지(Over Technology)’ 기기를 수시로 떠올리곤 했다. 그중 상당수는 테슬라만의 놀라운 과학 이론을 바탕에 두고 있었지만 시대를 너무 앞선 탓에 실현되지 못한 발명품이 매우 많다.

대표적으로 뉴욕의 ‘워든클리프 타워(Wardenclyffe Tower)’가 있다. 이 프로젝트는 전 지구에 전기를 공짜로 나눠주겠다는 니콜라 테슬라 평생의 야심작이었다. 그는 지구를 하나의 전도체로 활용하면 주파수에 전기 에너지를 담아 무선으로 송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통해 전 세계를 하나로 잇는 원격통신 플랫폼을 만든다며 유명 투자가 J.P 모건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으나, 전기를 무료로 나눠주는 프로젝트로 돈을 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건이 자금 지원을 끊으며 프로젝트는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테슬라는 사비로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려 했으나 그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는데, 이 사건은 테슬라가 파산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로도 꼽힌다. 또 결국 완성되지 못한 타워는 1차 세계대전 중 철거됐다.

결국 완성되지 못한 워든클리프 타워
결국 완성되지 못한 워든클리프 타워

이 외에도 테슬라는 구그리에모 마르코니(Gugliemo Marconi)와 특허 논란이 있긴 하지만 라디오의 최초 개발자로 인정받고 있으며, TV 리모컨이 등장하기 50년 전인 1898년에는 무선으로 원격 조정하는 배를 개발해 전기 전시회에서 시연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전기와, 전기를 활용한 무선 기술 개발에 있어서는 마법사와 다름없던 그였다. 레이더와 헬리콥터의 기본 원리를 제안했으며, X레이 촬영 등에 사용되는 X선 역시 기술적인 구현은 테슬라가 뢴트겐보다 몇 주 정도 빨랐다.

 

에디슨과 테슬라는 왜 양립할 수 없었나?

흔히 토마스 에디슨과 니콜라 테슬라의 관계는 희대의 숙적이자 라이벌로 전해지곤 한다. 둘 모두 당대에 큰 업적을 남긴 발명가들임이 분명하지만 두 사람의 사고방식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노력형대 영감형, 현실파대 이상파, 사업가대 연구가 등 그들에게 애초에 공통점이란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심지어 1915년 테슬라와 에디슨은 나란히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두 사람 모두 공동수상을 거부해 노벨상은 결국 리드대학의 윌리엄 헨리 브래그 교수와 그의 아들인 윌리엄 로런스 브래그 교수에게 돌아갔다. 과학자라면 최고의 영예로 여기는 노벨상 수상마저 거부해야 했을 만큼 그들은 양립하기 어려운 사이였던 것이다. 

테슬라와 평생을 대립했던 또 한명의 천재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
테슬라와 대립했던 또 한 명의 천재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

그러나 에디슨은 적어도 테슬라의 실력만은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1896년 일렉트로니컬 리뷰 5월호에서 에디슨은 테슬라에 대해 “나에 대해 뭐라 하든 상관없다. 그러나 테슬라가 불가능해 보이는 낙관적인 발언을 하더라도 그가 최고의 실험가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시간만 주면 테슬라는 이것이 빈말이 아니란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반면 테슬라는 죽을 때까지 에디슨을 싫어하고 경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디슨은 최소한 사업가적 수완을 통해 평생 동안 부와 명예를 충분히 얻었기에 테슬라 자체가 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 

반면, 테슬라는 젊어서부터 에디슨의 갖은 사업 방해에 시달렸으며 그 때문에 많은 시간을 마음고생 속에 살아간 인물이다.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 발명에만 몰두했던 그에게 자신의 발명을 폄하하고 방해했던 에디슨은 결코 인정하기 힘든 존재였을 것이다.

일각에선 전해지는 바와 달리 두 사람의 관계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때문일까, 한편으론 테슬라와 에디슨이 서로의 스타일을 존중하는 친구로 만나 경쟁이 아닌 협력을 택했다면 어땠을까란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만약 테슬라의 번뜩이는 영감과 에디슨의 노력, 수완이 더해졌다면, 과연 또 어떤 걸작이 세상 빛을 보았을까?

 

니콜라 테슬라를 기억하며

삶 자체가 워낙 엉뚱하고 기묘함에 가득 찬 인물이라, 테슬라에 대해선 온갖 괴담이나 확인되지 않은 루머들이 전해진다. 그를 일일이 검증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그의 열정과 업적, 천재성을 동경하는 사람들의 사후 헌정은 과거부터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테슬라 사후 1960년 파리에서는 자속 밀도를 표현하는 단위로 ‘T(테슬라)’가 제정됐으며, 세르비아의 가장 큰 발전소 이름은 TPP 니콜라 테슬라다. 또 IEEE 니콜라 테슬라 어워드는 전력 발전과 이용 분야에 있어 특출한 기여를 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영예로운 상이다.

현재 테슬라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리고 있는 사람은 21세기 테슬라로 불러도 손색없는 천재 사업가 ‘테슬라 모터스’의 일론 머스크다. 그는 테슬라가 1888년 특허를 낸 AC(교류) 인덕션 모터로 최초의 전기 스포츠카를 만들겠다는 계획 아래 사명을 테슬라로 정했다고 밝혔다. 현재 테슬라 모터스는 토요타에 이어 전 세계 2위 규모로 성장한 전기자동차 전문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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