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인물열전] ‘모두의 인터넷’을 만든 전길남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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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인물열전] ‘모두의 인터넷’을 만든 전길남 박사
  • 이건한 기자
  • 승인 2020.02.1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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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닫혀 있던 인터넷의 장벽을 허물다

[테크월드=이건한 기자] 요즘 젊은 세대에게 인터넷 없이 단 일주일만 살아보라고 하면 어떨까? 숨 쉬듯 이뤄지던 소통들이 단절되며 답답함을 느낄 것이고, 여가 시간이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할지도 모른다. 비단 젊은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21세기엔 남녀노소를 떠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잠들기까지 인터넷과 연결된 삶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공공재였던 것은 아니다. 오늘의 인터넷이 있기까지 많은 초기 인터넷 공헌자들의 노력이 있어 왔고, 특히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한국에 인터넷을 개통한 전길남 박사의 사례는 인터넷의 세계화 측면에서 중요한 시발점을 남긴 사건이다. 평생을 세계 인터넷 발전에 기여해온 그는 2012년 ISOC에서 제정한 ‘제1회 인터넷 명예의 전당 33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며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CCKoreaCreative Commons Global Summit 2015에서 강연하는 전길남 박사 (출처=CCKorea)

'될성부른 한국인' 전길남

전길남 박사는 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일본 오사카에서 교포 2세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수학과 수영을 좋아했던 활달한 청년이었고, 고등학생 땐 학생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정체성은 조국, 대한민국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1960년 한국에서 4·19 혁명이 일어났을 무렵, 일본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약 1만 5000명 이상이 운집했던 당시 시위에서 학생 대표였던 전 박사는 연설 도중 도저히 ‘우리나라’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던 조국을 두고 일본을 우리나라라고 말해야 했던 상황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던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본격적인 한국행을 결심한다. 어차피 대학을 졸업해도 교포로 취직할 수 있는 일자리는 한정적이었고, 그렇다면 더더욱 조국에 돌아가 국가를 위해 이바지하는 것이 나으리란 판단이었다. 그때 전 박사가 선택한 분야가 첨단 과학 분야의 하나였던 전산학이다. 일본에서 대학을 마친 그는 언젠가 한국 기술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꿈을 안고 곧장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맡겼다.

참조 - 네이버캐스트, 대한민국 인터넷의 아버지, 전길남(2014.04)

 

인터넷, 그 운명적인 만남

미국 UCLA 컴퓨터공학부 대학원에 진학한 청년 전길남은 그곳에서 운명과도 같은 인연을 만난다. 당시 UCLA 전산학 석사 과정을 담당하던 레너드 클라인록(Leonard Kleinrock) 교수는 근대 인터넷의 시초로 불리는 ‘아파넷(ARPAnet)’의 프로젝트 책임자로, UCLA에서 패킷 교환 방식의 인터넷 기술을 연구하고 있었다.

비록 당시 정세상 외국인 신분의 전길남이 아파넷 연구에 직접 참여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클라인록 교수 밑에서 초기 인터넷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고 들을 수 있었던 기회였다. 이후 NASA(미항공우주국) 연구원을 거쳐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전 박사가 다시 UCLA로 돌아온 1969년 10월은 UCLA가 아파넷을 통해 마침내 최초의 인터넷 교신을 성공시킨 시기다.

인터넷의 탄생 과정을 지근거리에서 경험한 전길남 박사가 인터넷의 잠재력을 일찍이 깨우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경험에 기인한 것이다. 또한 전길남 박사와 클라인록 교수는 공교롭게도 수십 년 뒤, 제1회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나란히 오르며 놀라운 재회를 나누게 된다. 

인터넷 보급에 기여한 공로로 인터넷 명예의 전당 제1회 수상자에 이름을 올린 전길남 교수
인터넷 보급에 기여한 공로로 인터넷 명예의 전당 제1회 수상자에 이름을 올린 전길남 박사, 1열 밑에서 5번째에 그의 스승인 클라인록 교수가 있다.

고국이 원한 건 인터넷이 아닌 PC였다. 하지만 -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 과학 기술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마음으로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에게도 기회는 찾아왔다. 1960~1970년대는 전후 대한민국이 탄탄한 과학 기술 연구의 근간을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기다.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설립을 시작으로 1976년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 현 ETRI)에 이르기까지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의 과학 연구를 책임지고 있는 많은 기관이 이 시기에 창설됐으며, 전길남 박사는 1979년 정부의 해외 과학자 유치 프로그램을 통해 마침내 한국 땅으로 입성하게 된다. 

당시 정부가 전 박사에게 제안했던 연구는 수출이 가능한 컴퓨터(PC)의 개발이었다. 하지만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더 높이 평가했던 전 박사는 1980년 컴퓨터 네트워크와 관련된 개발 제안서를 제출했으나, 수익성을 이유로 반려당하고 만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이듬해 ‘컴퓨터 연구 개발 국책 프로젝트’란 이름의 계획서를 다시 제출해 정부 심의를 통과했으며, 이를 응용한 계획의 일환으로 한국 최초의 TCP/IP 기반 인터넷 네트워크인 ‘SDN’ 개발에 성공한다. 또 정부가 요구한 대로 당시 이 프로젝트를 통해 최초의 국산 16비트 컴퓨터인 ‘SSM-16’이 함께 개발됐으며, SSM-16은 이후 SDN을 위한 라우팅 컴퓨터로 중요한 활약을 펼치게 된다. 

대한민국 최초의 16비트 PC, SSM-16 (자료=ETRI)
대한민국 최초의 16비트 PC, SSM-16 (출처=ETRI)

글로벌 인터넷의 서막

SDN의 개발은 여러모로 큰 의미를 담고 있다. 1982년 서울대학교와 경북 구미의 ETRI를 연결했던 첫 패킷 데이터 교환 실험은 미국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였던 인터넷을 자체 기술로 구현해냈다는 점에서 당시 전길남 박사와 한국 연구진의 앞선 네트워크 기술을 증명해낸 사건이었다. 그 시기 아파넷을 비롯한 인터넷은 영국과 노르웨이를 비롯한 미국의 일부 우방 국가간 연결에만 사용되던 비공개 기술이었다.

전 박사와 연구팀의 성과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국내 연결을 넘어 한국에서 해외 인터넷망에 접속하려면 별도의 라우터 장비가 필요했지만, 미국은 보안을 이유로 한국에 대한 라우터 판매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 전길남 박사와 그의 연구팀은 앞서 개발한 SSM-16에 3Com의 ‘UNET’이라는 네트워크 패키지 소스를 개조해 넣는 방식으로 아예 독자적인 라우터 장비를 만들어 내고야 만다. 인터넷이 공공재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아무도 열어주지 않았던 글로벌 인터넷으로의 빗장을 스스로의 힘으로 풀어냈던 대사건이다. 

참조 - 디지털라이프 연구소, [웹툰] 대한민국 인터넷 아버지 전길남
 

 

한국, 아시아 인터넷 기술 성장의 허브가 되다

이런 한국의 성공은 주변국들에게 강한 자극을 심어주었다. 기술 후진국으로만 여기던 한반도의 작은 나라에서 자체 PC에 이어 인터넷 개발까지 성공했으니 경쟁심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에 주변국들도 속속 인터넷 연구에 뛰어들기 시작했고, 우리는 미국과 달리 기술 공유에 인색하지 않았다. 

인터넷 연결에 성공한 뒤 2년이 흐른 1984년, 전길남 박사의 제안으로 한국, 호주, 일본, 인도네시아, 싱가포르의 연구자들이 마침내 아시아넷(AsiaNet)을 발족해 네트워크 공동 개발과 각종 학술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으며, 이와 함께 국제 네트워크 구성에 필요한 논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전 박사는 이어 1985년 설립된 태평양 컴퓨터 통신 심포지엄의 프로그램 의장 역임하며 아태지역 초기 인터넷 확산에 큰 공을 세웠다. 

참조 - 안정배, 한국 인터넷 역사 프로젝트 (2013.01)
 

개발만큼 중요한, ‘안전한 기술’을 만드는 것

전길남 박사는 지금도 후학을 양성하며 올바른 인터넷 발전을 위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과거 그가 지휘하던 시스템 아키텍처 연구실(SA랩)에서 넥슨의 창업주인 김정주 NXC 대표, 리니지를 만든 송재경 현 XL게임즈 대표, 한국 최초의 인터넷 회사 아이네트를 창업한 허진호 박사, 네오위즈의 원클릭 서비스를 만든 나성균 대표 등이 배출된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그는 선도적인 기술 개척자이지만 반대로 기술이 지닌 잠재적 위험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그에 대한 경고를 아끼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2014년 ‘서울디지털포럼’ 기조연설에서는 “인터넷 보급에만 집중하다 미처 안전한 인터넷을 만드는 일에 소홀했던 것은 잘못”이라 고백하기도 했으며, 2018년 TCP/IP를 개발한 빈트 서프(Vint Cerf) 당시 구글 부사장과의 대담에서는 “기술을 남용하는 사람들은 기술로 큰 이익을 거두고 있지만 그들에 대한 충분한 견제와 균형이 부족하다”며, “기술 콤플렉스 시대에서 벗어나 이제는 기술을 어떻게 통제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때”란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참조 - 한겨레, '기술의 미래'를 보는 빈트 서프-전길남의 시각 (2018.05)
 

이런 전길남 박사의 정신처럼, 인류에겐 기술의 발달만큼이나 기술 발전의 미래 부작용을 대비하는 선구자들의 노력이 함께 필요하다. 또한 그것이 현대 기술 발전을 이끌어 가고 있는 리더들의 손끝에서 이뤄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수십 년간 한국과 세계 인터넷 보급에 앞장섰던 전길남 박사는 이제 원로 과학자로서 젊은 후배들에게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귀감이 되는 존재다. 도전과 변화를 멈추지 않았던 그의 생애가 매너리즘에 빠진 한국 IT 산업이 다시금 새롭게 전진할 수 있도록 하는 교훈이자 원동력이 되길 바래본다.

 

테크월드 - 월간<EMBEDDED> 2월호 [IT인물열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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