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에서 융합현실까지

[테크월드=정환용 기자] 

Part 1. VR의 핵심 기술, 헤드 마운트 디스플레이
Part 2. 세계를 구현하거나, 혹은 혼합하거나
Part 3. 국내 가상현실 시장의 현황과 전망

PC 모니터는 1990년대 초반 곡면 브라운관에서 평면 LCD, LED로 바뀌었다. 3D 화면을 지원하는 모니터가 잠시 시장을 흔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점유율이 미미한 수준이어서 언급하지 않겠다. 볼록한 브라운관은 화면 주변부의 왜곡이 심했고, 평면으로 바뀐 후에는 사람의 시야각으로 인해 중앙부와 주변부와의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이 차이를 없애기 위한 것이 좌우가 안쪽으로 휘어진 커브드 모니터다. 지금은 게임용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고 추후 곡률과 화면 비율, 가격대가 좀 더 개선되면 현재의 점유율을 좀 더 높일 수 있을 듯하다.

가상의 비서를 예로 들어보자. ‘VR’이란 단어가 보편적이지 않던 시기에는 가상의 비서가 있을 곳은 모니터 안이었다. 오큘러스 리프트와 HTC 바이브, 삼성 기어 VR의 등장으로 가상의 비서가 일하는 공간은 HMD를 착용한 사용자의 주변으로 넓어졌다. 게임이 대부분이었던 가상현실 콘텐츠의 분야도 여행, 쇼룸, 쇼핑 등으로 조금씩 확장되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다른 형태의 화면 속에 있었던 비서 A가 비로소 화면 밖으로 나와 현실 속에 서게 된다.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워질 정도로 가상의 비서가 정교해지는 것을 ‘혼합현실’(Mixed Reality), 혹은 ‘융합현실’(Merged Reality)라 칭한다.

 

가상의 세계를 현실에 구현, 가상현실
VR은 모니터로 볼 때 생기는 거리감 왜곡이 거의 없다.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의 시선은 좌우로 약 180도, 위아래로 135도 정도인데, VR 기기의 HMD를 착용하면 정면과 좌우는 물론 후면과 상단까지 시야를 넓혀 사용할 수 있다. 사실상 HMD를 착용하면 가상의 공간 한가운데 서 있게 되는 셈이다. HMD 착용자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사방 모든 곳에 가상공간을 구현할 수 있고, 이는 넓은 관점에서 보면 VR의 장점인 동시에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하다.

VR의 특징 중 하나가 ‘전방위 가상공간의 구현’이다. 360도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 콘텐츠를 감상할 때는 마치 사용자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평면 화면으로 경험할 수 없는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다. 한 번도 못 가봤던 여행지를 마치 그곳에 있는 것처럼 감상할 수 있고, 예전에는 키보드나 게임 패드로 캐릭터의 시선을 돌려야 했던 움직임을 실제로 고개를 돌려 빠르게 적을 처치할 수 있다. 게임 산업에 있어서 VR의 보편화는, 장르의 제한이 있더라도 새로운 플랫폼을 활용할 수 있는 시도가 가능해졌다.

VR 게임은 실제로 움직여야 하는 사용자의 위치에 대한 제약이 발목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역으로 활용해, 비행 시뮬레이션처럼 한 공간에서 더욱 세밀한 표현과 활동을 할 수 있는 장르의 작품에서 장점으로 활용할 가능성 또한 염두에 둬야 한다.

하지만 사용자가 어느 한 곳에 고정돼 있다는 점은, 사용자가 그 공간 한가운데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특히 게임의 경우 콘텐츠 자체가 한 자리에서 미션을 수행하는 형식이 아니라면 이동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다. 현재 소니 플레이스테이션4에 연결해 사용할 수 있는 PS VR을 지원하는 타이틀이 조금씩 늘고 있다. 조만간 출시 예정인 작품들을 포함해, 기자가 PS VR로 즐길 수 있는 게임으로 가장 기대되는 것은 비행 전투 액션 ‘에이스 컴뱃 7: 스카이 언노운’(Ace Combat 7: Skies Unknown)이다. 애초부터 전투기에 탑승하는 콘셉트라서 의자에 앉아서도 충분히 VR의 장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크다.

 

가용 공간의 확장, 증강현실
VR이 HMD 화면 속에서만 구현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면, AR은 그 한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기술이라 할 수 있다. AR은 먼저 사용자가 볼 수 있는 전면의 영상을 카메라로 잡고, 카메라에 촬영되는 현실의 공간을 파악해 그곳에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 준다. 포켓몬 고의 화면처럼 몬스터가 책상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물론 포켓몬 고를 포함한 AR 콘텐츠들이 현실 이미지의 사물을 완벽하게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가상 이미지의 거리감은 크기를 조절해 보여주는 식이고, 콘텐츠의 특성상 현실과의 괴리도 있는 편이다.

현재까지 대표적인 AR 기기라 할 수 있는 것은 구글 글래스와 마이크로소프트 홀로렌즈다. 두 기기의 특징은 전면 디스플레이가 투명하다는 것. AR 기기를 착용하면 VR 기기처럼 전면을 가리지 않는데, 헤드셋에선 실행 중인 콘텐츠에 따라 가상의 이미지를 헤드셋 내부에서 투명 디스플레이에 구현해 준다. 그러면 AR 기기의 공간 인식 기술에 따라 이미지의 거리감을 조절해 가상 이미지를 현실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간다.

현재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증강현실은, 스마트폰으로 현실 세계에 가상의 개체를 ‘얹어놓은’ 화면을 보는 것이다.
나이안틱의 증강현실 게임 ‘포켓몬 고’의 세계적인 흥행은, 포켓몬이라는 인기 IP를 활용한 것이 첫 번째, 게임을 즐기는 새로운 방식이 두 번째 요인이었다. 항상 보던 사무실 책상 위에, 화장실 변기 위에, 공원의 벤치에 귀여운 몬스터가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 가장 컸다. 국내에서 포켓몬 고의 인기를 얻기 위해 찍어내듯 만든 AR 게임들이 빛을 발하지 못한 것은, AR의 구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게임에 사용된 콘텐츠가 포켓몬 정도의 인기가 없어서였다.
사진의 오른쪽 남자가 착용하고 있는 것이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든 증강현실 기기 ‘홀로렌즈’다. 테이블 위 가상의 이미지는 홀로렌즈를 착용한 상태에서 보이는 것으로, HMD 전면의 투명 디스플레이에 가상의 개체를 현실 위에 띄워주는 방식이다. 몇 년 전에 구글에서 ‘구글 글래스’로 먼저 시도됐던 증강현실 기기는, 홀로렌즈의 출시로 좀 더 생활에 가까워졌다.

가상과 현실 세계의 혼합, 융합현실
VR은 HMD 속 화면에 가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고, AR은 스마트폰이나 투명 디스플레이 너머의 현실에 가상의 이미지를 얹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어떻게 될까? 영화 ‘아이언 맨’에서 토니가 구현하는 로봇 기술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토니는 이미 농담을 주고받는 인공지능 비서 ‘자비스’를 만들 정도로 시대초월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다. 단독 영화 세 편을 보면 가상의 세계를 다양한 방법으로 구현하는데, 그가 개발한 장비 마크 시리즈의 헤드기어 내부는 토니에게 기체의 상태를 비롯해 다양한 정보를 증강현실 형태로 제공한다(정작 주변을 살피는 시각은 헤드기어의 좁은 눈구명 두 개가 전부인 것은 영화에서 잘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토니 자신이 장착하지 않은 기체를 안경 형태의 헤드셋으로 조종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영화 ‘아이언 맨 2’에서 독성이 없는 새로운 물질을 만들기 위해 아버지가 남긴 엑스포의 조감도를 분석하는 장면이다. 인공지능 컴퓨터 ‘자비스’에게 조감도를 그래픽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내리는 토니는, 자비스가 현실 공간에 만들어낸 가상의 조감도를 손동작으로 조종한다. 새로운 원자의 형태를 찾은 토니는 두 손을 번쩍 들어 그래픽을 방 안에 가득 찰 만큼 확대하고, 마지막에는 소프트볼 크기로 줄여 손 위에 올리기도 한다.

처음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는 이 부분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최근 블루레이 타이틀로 다시 돌려보며 이 기술을 나름대로 분석해 봤다. 일단 현재의 컴퓨터 그래픽과 구현 기술로 방 전체에 조감도를 띄우는 것은 홀로그램의 일종인데, 영화에서처럼 구현하려면 해당 그래픽을 구체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홀로그램은 광원을 만드는 레이저, 그리고 레이저를 간섭시켜 원하는 형상을 원하는 위치에 구체화시킬 수 있는 반사체가 조합돼야 한다. 방 전체에 수만 개의 레이저와 반사체가 있다 해도, 이를 손으로 만지듯 조종하려면 홀로그램을 제어하는 컴퓨터가 사용자의 손을 컨트롤러로 인식해야 한다. 게다가 어떤 동작이 어떤 명령을 뜻하는지 파악하는 과정도 필수다.

결국 가상의 이미지를 현실 공간에 구현하는 기술에 있어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문제는 ‘빛’이다. 광자로 구성된 빛은 정지했을 때의 질량이 0이다. 속도는 1초에 약 30만 km이고, 현재 빛보다 빠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증강현실이나 융합현실 기술은 모두 사용자가 어떤 형태로든 가상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디스플레이를 사용하는데, 영화에서처럼 중간 매개체 없이 가상 이미지를 현실에 만들어내기 위해선 먼저 빛의 성질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스타 워즈’를 비롯해 수많은 SF 영화에서 빛을 반사체 없이 차단하는 기술이 나왔지만, 아직 현실에서 구현된 빛 차단 기술은 없다.

2015년 공개됐던 신형 구글 글래스가 출시됐다면, 오히려 VR보다 먼저 AR 기술이 먼저 세상에 나오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지금은 프라이버시를 비롯한 여러 문제로 개발이 중단됐고, 새로운 소식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지난 2014년 유럽의 축구경기에서 코치가 착용했다는 구글글래스의 화면이다. 경기를 분석하는 애플리케이션을 연동시켜, 현재 점수를 비롯해 공 점유율, 유효 슈팅, 팀 파울 정보 등을 볼 수 있다.

 

영화 ‘투모로우랜드’에서도 비슷한 개념의 홀로그램이 나온다. 집을 지키는 개의 형상이 알고 보면 살아있는 개가 아니라 가상의 이미지인데, 이는 제한된 공간이 아니라 사방이 열려 있는 공간이란 점에서 기술적으로 ‘아이언 맨’보다 더 뛰어난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영화처럼 그림자까지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정교한 홀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제약이 없는 공간에서의 구현은 어렵지만, 적어도 정해진 구역이나 공간 안에 홀로그램과 비슷한 원리의 가상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는 MR의 확장과 발전과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기술이고, 더불어 MR 체험의 가능성을 훨씬 폭넓게 확장시킬 수 있는 기폭제 역할이 될 수 있다. 물론 기기 가격의 안정과 제품군의 다양성을 통해 얼마나 빠르게 보급되는지도 관건이다.

MR 기술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입장도 있다. 증강현실 기술을 빠르게 사업에 적용시킨 가구 업체 이케아의 경우, 모바일 앱을 통해 자사의 가구와 제품들을 집에서 편리하게 적용해볼 수 있다. 이 경우는 소비자 입장에서나 판매자 입장 모두에서 장점이다. 증강현실 기술이 일반적으로 보급되면 가구 업체는 오프라인 매장을 유지할 필요가 없고, 유통 구조의 간소화로 소비자에 공급하는 가격도 낮출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가상의 쇼룸 기술은 부동산이나 자동차 업계등 여러 분야의 일자리를 큰 폭으로 줄이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도 있다. 굳이 학원을 찾아가지 않고도 가상의 강의를 들을 수 있고, 백화점을 가지 않아도 편리하게 쇼핑을 할 수 있게 된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삶이 더 편리해지는 것은 지금까지나 앞으로나 계속될 발전의 과정이겠지만, 이로 인한 부정적 영향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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