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월드뉴스=서유덕 기자] 몇 년 전부터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글로벌 공급망 가치 사슬에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리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변화의 속도가 빨라졌다. 반도체 산업의 중심이 북미·유럽에서 아시아로 옮겨왔고, 팹리스(Fabless, 반도체 설계 업체)의 주 고객사가 반도체를 직접 설계하기 시작했다. 시장 상황이 급변하자 반도체 업계는 새 질서에 맞는 기업 체질을 만들어 가고 있다. 사업 전환 카드를 꺼내 드는 업계 리더들도 나타나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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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난이 부른 반도체 대세론

최근 몇 년간 반도체 산업이 크게 변하고 있다. 기술 면에서 반도체 선폭을 미세화하는 것이 한계에 다다르고, ‘반도체 집적회로(IC)의 성능이 18개월에 2배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에 반도체 기업들은 선단 공정을 혁신하기 위해 미세 선폭 구현보다 GAA(게이트 올 어라운드) 같은 아키텍처 개선이나 3D 적층 구조 같은 패키징 기술을 개발하면서 대안을 찾아 나섰다.

시장 상황도 변하고 있다. 반도체 기업들의 고객이던 IT 서비스·완제품 공급사들이 자체적으로 반도체를 설계하면서 경쟁사로 둔갑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아마존은 아마존웹서비스(AWS) 서버용 프로세서 그래비톤과 인공지능(AI) 칩 인퍼런시아를, 애플은 맥북과 아이패드에 탑재하는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M1 칩을 만들었다. 빅테크 기업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경영 컨설팅 기업 액센츄어(Accenture)의 시드 알람(Syed Alam) 반도체 산업 부문 책임은 “범용 칩셋을 사용하기보다 맞춤형 칩셋을 원하는 추세가 강해지고 있다”며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통합해 제품을 더 잘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경쟁 제품과 차별화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2020년부터 본격 유행하기 시작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반도체 산업에 지각 변동을 부추겼다.

코로나19는 글로벌 공급난을 초래했다. 코로나19가 만든 비대면 사회는 IT 수요를 급격히 늘렸는데, 대유행 초 급격히 위축된 경제 상황에 생산량 감축을 단행했던 반도체 기업들은 수요 반등에 대응할 여력이 없었다. 이로 인해 불거진 반도체 수급 불균형은 업계에 전례 없는 호황으로 작용하면서도 재료와 생산라인을 확보하기 위한 무한 경쟁이라는 부담을 지웠다.

글로벌 공급난은 반도체의 중요성을 각인시켰다. 반도체가 부족하자 많은 IT 서비스·완제품 공급 기업들이 생산 차질을 겪었다. 반도체 부품 부족을 가장 심하게 겪는 자동차 제조사들은 부품 부족으로 수 개월 동안 공장 가동을 멈춰야만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4월에 현대자동차 울산1공장이 일주일 문을 닫았고, 아산 공장은 2020년 말 이후 8차례나 가동을 중단했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스마트폰·태블릿·PC 제조사, 데이터센터 증설을 준비하던 클라우스 사업자까지 반도체 부품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기업을 넘어 세계 각국 정부까지 반도체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에 나섰다. 미국은 세 차례나 반도체 대기업들을 불러 공급망 회의를 열고, 미국 내 시설 투자와 반도체 공급망 관련 정보 제출을 요구했다. 중국은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면서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이 과정에서 반도체 공급망을 중심으로 한 미국과 중국 간 무역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이제 반도체는 경제와 산업의 영역을 넘어서 외교·안보적 관점에서 전략물자가 됐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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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만이 살 길

“마누라랑 자식 빼고 다 바꿔라.” 이 문장은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임직원 회의에서 변화를 주문하며 던진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IT·전자 시장에서 이류로 추락할 위기에 놓였던 1990년대 삼성전자는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을 계기로 글로벌 일류기업 반열에 올랐다.

위기라고 진단하고 변화를 선택하는 것은 기업이 생존하기 위해서다. 기업의 고위 임원들은 정체된 경영을 혁신하려고 노력한다. 외부 환경에 민감한 사업을 영위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삼성전자를 포함한 글로벌 대기업들은 지난 수십년 동안 변화에 맞서며 현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최근 급변하는 반도체 산업계에서 기업들이 혁신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모든 산업에서 혁신은 늘 있어왔던 얘기다. 그럼에도 최근 반도체 업계가 유독 혁신을 더 강조하는 이유는 산업 구조와 시장의 변화 양상이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큰 규모로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이제 반도체 기업들은 기존 사업을 폐지 또는 축소하면서까지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는 ‘사업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한국 딜로이트는 12월 29일 발표한 ‘반도체 산업 전환 연구’ 보고서를 통해 “주요 반도체 기업 58%가 사업 전환을 이미 진행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통신칩·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전문 팹리스인 퀄컴이 통신 모듈과 기기, 소프트웨어를 거쳐 플랫폼 통합까지 아우르는 서비스형 IoT 솔루션을 출시하고 ASML 같은 반도체 장비 기업이 고객 서비스 매출 비중을 늘리고 있다. 이제 반도체 칩, 장비를 판매하고 전통적 유지보수만 지원하는 것만으론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반도체 생태계에 속하는 기업들이 개별 제품을 판매하는 일회성 수익 모델에서 탈피해 기능과 도구까지 통합 제공하고 관리·모니터링까지 지원하는 서비스형 수익 모델로 전환하는 것은 눈에 띄는 사업 전환 사례 중 하나다.

기술과 시장 변화에 글로벌 공급난이 촉진한 반도체 가치 상승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고 경쟁을 심화한다. 반도체 업계는 새로운 시장 확대와 수요 급증이라는 기회를 얻으면서도 경쟁이 심화하고 외교적 문제로 비화하는 예상 외 변수를 만나며 위기를 맞고 있다. 단편적인 방법만으로는 큰 폭으로 변화하는 시장 구조에 적합한 체질을 만들 수 없는 상황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업 전환은 업계 전반으로 퍼져나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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